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Nov 14. 2021

좌절된 미니멀리즘에의 다짐

노스 조지아 프리미엄 아웃렛

만화 <슬램덩크>에서 안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포기하는 순간 시합 종료라고. 하지만 우리는 비장미가 있는 원작의 이 대사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포기하면 편해"라는 패러디 대사에 더 공감한다. 어느 순간에는 정말 빨리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기도 하니까. 나도 빨리 포기해야 했었다. 이 물류대란 속에서도 내가 보낸 짐은 적어도 세 달 정도면 도착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은 애당초 품는 게 아니었다. 9월 말에 보낸 이삿짐이 선적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다 여태 부산항에서 배조차 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달았다. 아, 올해 안에 짐이 도착하기는 글렀구나. 지금까지는 조금만 참으면 될 거라는 생각에 이민가방에 바리바리 싸들고 간 몇 안 되는 가재도구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었다. 그러나 몇 달을 이렇게 사는 건 불가능했다. 더구나 미국까지 와서 더 이상 궁상맞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기다리기를 깨끗이 포기하고 쇼핑에 나섰다.


가장 필요한 것은 선글라스였다. 우리나라의 11월을 생각하고 선글라스들을 모두 배편으로 보낸 것이 실수였다. 이곳은 11월이라 해도 햇살이 너무 강해서 낮에는 눈을 뜨고 다니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선글라스를 어디서 구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느 쇼핑몰로 가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프리미엄 아웃렛을 가보기로 했다. 아웃렛에는 선글라스 매장이 하나 있었는데, 서양인들과 얼굴의 골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보니 한국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의 제품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타일을 따질 때가 아니어서, 적당히 사이즈가 맞고 크게 튀지 않는 것으로 집어 들었다. 한편, 두 어개의 접시와 공기로 매끼 식사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식기들도 마련하기로 했다. 경험상 저렴한 식기는 중고장터에 무료 나눔으로 내놔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냥  조금 비싸더라도 마음에 드는 식기를 사서 쓰다가 한국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아마존에서 파스타볼이나 샐러드 접시 같은 것들을 열심히 뒤져 이미 가지고 있는 식기들과 다른 디자인으로 잘 골라 주문해 놨는데, 막상 아웃렛에서 다른 예쁜 접시들이 눈에 들어오니 이건 뭐 자제가 안되는구나.


w

§ 홀린 듯이 사버렸지만 꼭 필요했다고 뒤늦게 합리화 중인 크리스마스 진저 쿠키 접시와 르쿠르제 해리포터 에디션 접시. 한편, 코치는 사실 물건을 사려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선 코치가 싸다고들 하도 그러길래 대체 얼마나 지 값이나 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가게를 나설 땐 손에 남편의 스니커가 들려 있었다. 나는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싶다. 그래도 파스타볼은 정말 필요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덕분에 더 이상 파스타를 국그릇에 담아 먹는 신세는 면했으니까. 주물 밥솥은 아직 안 써봤지만 이제 밥을 잘해 먹으면 잘 산 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해 먹으면.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쇼핑을 시작하니 자연히 반품할 물건들도 생겼다. 주로 아마존에서 쇼핑을 하다 보니 실물을 보지 못해 막상 받아보면 사이즈가 다른 물건들이 있었다. 반품 절차는 꽤 간단해서 아마존 사이트에서 반품 신청을 한 후 포장을 하지 않은 채로 가까운 UPS에 가져다주면서 반품 신청 시 아마존에서 메일로 전송받은 QR코드를 직원에게 제시하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UPS가 있어서 쉽게 반품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반품을 마치며 남편은 '집 가까이에 UPS가 있으니 이제 아마존에서 마음껏 사도 되겠다'라고 말했다. 이제부터 소박한 삶을 살겠다던 며칠 전의 다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양이다.

  

§ 분명 상품의 상세 설명에는 5인치라고 되어 있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초 미니미 사이즈였던 케이트 스페이드 접시와 UPS에서 반품 접수 후 받은 커다란 영수증. 반지를 담는 용도의 Ring dish라고 쓰인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내 탓도 크다. 그나마 아마존의 반품 절차가 심플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전화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반품을 포기하고 방울토마토 하나라도 담아 먹으며 꼭 필요한 접시였다고 끝까지 우겼으리라.


이삿짐을 쌌던 두 달 전을 돌이켜 본다. 평소 살림이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도 막상 꺼내 놓으니 컨테이너로 한 가득이었다. 10년 치의 살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물건들도 많아서 크게 반성하며 앞으로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의 다짐은 너무나 무력하다합리화하며, 지난 며칠 간은 쇼핑이 불가피했다고 열심히 스스로를 납득시켰.




늘어가는 실림살이를 보고 있노라니 분명 나를 채우는 삶을 위해 떠나온 미국인데 정작 채우고 있는 건 물욕뿐 인 것 같아 어쩐지 뜨끔해진다. 허나 고백하건대, 쇼핑을 하는 순간은 정말 즐거웠다. 즐거움 대신 불편함을 기꺼이 선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과 갖고 싶은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 필요한 것들은 얼추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니, 갖고 싶은 것에서는 한 발 물러서 보려 한다. 부족하게 산다는 건 약간 불편한 일이 되겠지만, 욕심이 비워진 자리에 다른 종류의 행복이 채워질 거라 믿으며 오늘은 다시금 미니멀리즘을 다짐해본다. 이번엔 이 다짐이 좌절되지 않았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소박한 밥상, 담백한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