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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11. 2021

소박한 밥상, 담백한 생활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을 위해

그럴 리 없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 회사의 방침에 따라 받은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믿을 수 없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공복혈당 126. 그리고 당뇨병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 다시 생각하니 그럴 리 없는 게 아니라 그럴 만도 했다. 송별회를 한 답시고 출국 전 한 달은 매일 부어라 마셔라 해댔으니 몸 상태가 멀쩡할 리 없었다. 지난번 건강검진 때 콜레스테롤이 높아 혹독하게 체중감량을 하면서 간신히 정상 수치에 가깝게 맞춰 놓았던 각종 지표들이 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붉은 새우를 먹어 온 몸이 분홍색이 된 플라밍고처럼 우리 몸에도 우리가 먹는 음식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남편의 사지에는 맥주캔과 홈런볼(솔직히 홈런볼은 안 먹기엔 너무 맛있다), 삼겹살에 곱창 같은 것들이 주홍글씨처럼 붙어 있을 터였다. 이미 콜레스테롤 약도 먹고 있는데 당뇨약까지 먹으며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마침내 탄수화물과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물론 나는 정상 혈당이지만 가족의 협조 없이 식이요법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탄수화물과의 이별에 동참하기로 했다. 기꺼이는 아니고 마지못해.


§ 건강검진 결과를 받은 후 아마존에서 부랴부랴 주문한 혈당 측정기. 갤럭시 워치의 다음 버전에는 혈당 측정 기능이 들어간다던데 빨리 나오면 좋겠다. 한편, 밥 안 먹으면 죽는 사람처럼 꾸역꾸역 들고 간 저당 밥솥은 아마존에 주문한 변압기가 안 와서 써보지도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 제일 필요한 게 가장 늦게 도착하는 서글픈 현실.


모든 헤어짐이 그렇듯 탄수화물과의 이별은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특히 소울푸드인 빵과 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떡볶이와 이별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고 흐르지 못하게 살짝 웃어야 될 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남편의 피 속에 밥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DNA보다 더 많은 설탕이 흐르고 있다는데. 나는 코스트코에서 일 년 동안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은 거대한 사이즈의 닭가슴살과 연어 등을 구입해 냉장고를 채웠다. 담백한 삶의 시작이다.


§ 매끼 탄수화물, 특히 정제곡물의 섭취를 가급적 줄이려 노력 중이다. 덕분에 고기와 생선을 질리도록 먹고 있는데 미국은 고깃값이 싸서 그나마 다행이다. 담백한 식사라 속도 편하고 좋기는 한데 가끔 자극적인 음식이 엄청나게 땡긴다. 비록 살생은 피하지 못했을지언정 금욕 중인 수행자의 식사 같은 느낌이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내가 좋아하는 추사의 글씨 중 하나로 직역을 하자면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손녀'라는 뜻인데, 행복은 부귀영화나 산해진미가 아닌 가족과 함께하는 소박한 밥상에 있음을 의미한다. 오랜 유배생활을 마친 추사가 말년에 이르러 얻은 깨달음이 이 두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행복의 조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단순하게 살 수록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비록 자의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담백한 식단이 나를 소박한 삶으로 인도해 준다면 탄수화물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감내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가짓수를 줄인 조촐한 밥상으로 시작하는 하루에 자그마한 행복이 깃들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언제 보아도 멋진 추사의 글씨. 글에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만 글씨에는 기운이 넘친다. 메시지의 힘이 강인한 붓 끝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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