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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08. 2021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의 기록

시차적응 실패로 날아간 주말

계획은 그럴듯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이하는 주말을 근사하게 보내겠다는 야심을 품고 뭐 특별한 일 없나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다. 사실 지난 토요일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도 의지는 불타올랐다. 도착일이 마침 할로윈  즈음이라 각종 행사를 야무지게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혀를 차며 가당찮은 야욕을 멈추라 말했고, 결국 내 의지와 달리 급한 살림살이  마련에 정신이 없는 데다 시차 적응까지 실패하는 바람에 기껏 준비해 간 달고나 세트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주말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이제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어느 정도 적응했을 거라 딴에는 생각했더랬다. 마침 시청 앞 광장에서는 <2021 스와니 와인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이틀 째 내리던 비도 그쳐서 하늘도 화창하니 나들이 하기 딱 좋았다.


'그래, 이거야! 며칠 전 못 마신 와인을 여기서 마셔야겠어. 사람들 구경도 하고 잘됐다, 그치?'


남편도 행사가 마음에 드는지 흔쾌히 제안에 동의했다. 페스티벌은 오후 1시부터 4시 반까지 진행된다고 한다. 어두워지면 위험하니 대낮부터 술들을 마시나 보다. 그러면 느즈막이 아점을 먹고 슬슬 나가볼까? 나는 느긋이 요리를 하고, 식사를 마친 후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빨래를 돌려놓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막상 누우니 살짝 졸려오네. 나는 잠깐만 눈을 붙이자고 생각했다. 정말 아주 잠깐만. 그런데 아뿔싸! 눈을 뜨니 이미 4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직도 내 몸은 한국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 야심 차게 준비해 갔으나 꺼내 보지도 못한 달고나 세트. 송년회 때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줌으로 달고나 뽑기 대회를 열기로 약속한지라 연말까지 창고에 고이 모셔둘 생각이다. 스와니 와인 페스티벌은 매년 열리는 모양인데 티켓을 미리 구입할수록 저렴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출국 전 일주일은 거의 제대로 못 잔 데다 13시간의 비행 후 도착한 이곳은 다시 아침이어서 그대로 강행군이 시작됐다. 각 마트마다 파는 물건의 종류가 달라서 이케아, 월마트, 코스트코, 한인마트를 연달아 순회했으며,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조지아텍도 한 번 찾아갔고, 계좌 개설을 위해 은행도 방문해야 했다. 그 와중에 매일 새벽 2시면 눈이 떠져 밤새 뒤척이다 일어났으니 그 어떤 강철체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나가떨어질 만한 상태였던 것이다.


기왕 이리된 거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기로 했다. 분명 휴식을 위해 떠나온 미국인데,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피곤하게 지내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서두르지 말자. 미국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잖아.


전하, 신에게는 아직 50번의 주말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주말을 공쳤어도 아직 남은 날 들이 많으니 조바심 낼 것 없이 느긋한 하루를 보내자 생각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래 놓고 내일은 뭐 할지 고민하는 뼛속까지 성실한 한국인의 DNA가 몹시도 야속하구나.



§ 지난 주말 할로윈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호박 컵에 오렌지 주스라도 담아 기분을 내봤다. 한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매끼 식사는 성실하게 차리고 있다. 집안일을 생각하면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은 없다. 그 어떤 삶도 무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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