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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an 13. 2022

슬픔은 단절에서 시작된다

아니 그러니까, 영어는 슬프다고

어제 집 근처 Gwinnett Technical College의 ESL 신학기 과정이 오픈을 해서 첫 수업을 나갔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강생 모집이 끝난 상태라 등록하지 못했다가 지난 12월에 2022년 신학기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신청해 놓은 수업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과정이라 그런지 7주간 주 2회, 하루 3시간 수업료가 265달러로 크게 부담이 없는 수준인데, 미국에는 이런 대학 강좌 이외에도 무료 ESL 강좌도 많아서 욕심을 부린다면 영어를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한국인은 나를 제외하면 한 명뿐이고 그 외에 남미, 베트남, 일본 등 출신이 다양했는데 남미 사람들이 가장 많다. 열정적인 남미 사람들은 수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해서 질문도 많이 하고 리액션도 적극적이다. 서로가 서로의 악센트와 발음에 익숙하지 않아 소통이 늘 원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좋다. 수업의 효과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으니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을 것 같고. 오늘은 영어 수업이 시작된 기념 (?)으로 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영어를 못해서 겪은 그간의 불편함이야 한 둘이 아니고, 자동차 모델 Charger를 충전기로 잘못 알아 들어서 엉뚱한 답을 한다던가 자전거 Chain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내 자전거에는 체인이 있는데요' 같은 바보스러운 대답을 한 것 - 알고 보니 미국에선 자전거 열쇠도 체인이라고 부르더라 - 정도귀여운 애교 수준이다. 보다 근본적인 어려움은 심리적인데 있다. 외국 생활이 처음이라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데서 오는 서러움과 위축을 일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집 밖을 나서거나 누군가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실수를 연발하기도 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 모든 감정을 통틀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슬픔'이라고 정의했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해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하루키에게도 여전히 외국어는 서글픈 존재인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루키 에세이 <슬픈 외국어>의 원제는  <やがて悲しき外国語>라 초판은 제목이 <마침내 슬픈 외국어>로 되어 있었다는 것. 제목을 볼 때마다 やがて를 사전적으로 '마침내'로 번역한 것이 너무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번역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재판은 아예 やがて 를 빼버리고 <슬픈 외국어>로 제목을 바꾸어 버렸다. 제목을 둘러싼 이 에피소드 자체가 에세이의 주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해도 내 뜻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일종의 절망감에서 오는 서글픔 같은 것.


슬픔은 단절에서 시작된다


§ 영어공부하겠다고 한국에서 챙겨 온 스크래블. 물론 한 번도 안 했다. 어른이 되어도 공부는 변함없이 싫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실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라더니,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공부가 깨는구나.


그러다 최근에 누군가가 영어의 'after all'을 '아니 그러니까'로 초월 번역했다는 글을 읽고 유레카를 외쳤는데 やがて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해도 외국어는 결국 슬퍼진다고!' 정도가 제일 적당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남은 8개월 동안 겪어야 할 슬픈 사연들을 미리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동화에 나오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면  괜찮아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리는 없으니 반은 무뎌짐으로 나머지 반은 어떻게든 노력해서 단절의 간극을 줄여 보는 방향으로 극복해 보는 수밖에. 새드엔딩임을 알고도 보는 영화처럼 결국 슬퍼질 영어라 해도 일단은 부딪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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