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의 단점이야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을 꼽으라면 아마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리라. 크루즈 경험이라고는 단 한 번뿐이었는데 마침 그게 흥이 넘치는 바하마, 멕시코 크루즈였던 터라 나는 모든 크루즈가 그렇게 인싸들의 집합소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게다가 승객들의 연령층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크루즈 여행은 노인들의 전유물이라는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미국에서는 젊은 사람들도 크루즈를 많이 즐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 크루즈도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두 번째 기항지인 스캐그웨이에서는 캐나다의 유콘까지 가는 익스커션을 선택한 후, 광활한 유콘의 대지를 제대로 한번 걸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무거운 등산화까지 챙겨서 갔더랬다. 그런데 버스에 오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차 안에는 하이킹은 고사하고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노인들이 가득했다.
§한때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던 스캐그웨이는 불과 3년 만에 골드 러시가 사그라들면서 빠르게 쇠퇴했다. 지금은 소수의 주민들이 항구 근처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대부분 관광 수입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왼쪽은 스캐그웨이의 유명한 산악열차인 화이트패스의 제설 열차이고, 오른쪽은 알래스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토템 폴로 우리의 장승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바하마, 멕시코 크루즈는 젊고 신나는 크루즈로 유명한데 반해 알래스카 크루즈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주요 승객이라 점잖고 차분한 분위기라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익스커션이 활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스캐그웨이에서는 산악열차인 화이트 패스를 타고 유콘까지 다녀오는 관광 상품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몇 시간 동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따분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비가 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리뷰가 많아 우기임을 고려해 일부러 버스로 이동해 유콘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껏 고민해 고른 보람도 없이 드넓은 자연 속을 걸으며 느껴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시작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스캐그웨이와는 달리 유콘으로 이동할수록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는 정도일까. 가이드 말로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스캐그웨이와 유콘은 늘 날씨가 반대라고 하니, 아침에 내리는 비를 보고 크게 좌절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캐그웨이에서 유콘까지 가는 길에는 호수와 웅덩이를 여럿 볼 수 있는데 위의 에메랄드 호수가 가장 푸르고 아름답다. 아직 9월인데도 이미 나뭇잎들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언뜻 보면 봄꽃이 만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콘 테리토리는 캐나다 영토라 중간에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단체 관광이라 그런지 경비대원은 버스 안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별말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창밖으로는 유콘의 장엄한 풍경이 버스 속도에 맞추어 빠르게 뒤로 사라졌고, 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카메라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카리부 크로싱이라는 작은 마을에 멈추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 시간을 포함해 개인 시간이 제법 넉넉히 주어졌는데, 어차피 차가 없으면 마을 밖을 나갈 수가 없기에 에 남아도는 시간이 오히려 곤란할 지경이다. 그래도 작은 마을이지만 유콘과 알래스카의 야생 동물을 박제해 놓은 작은 박물관도 있고, 개썰매를 체험할 수 있는 곳과 염소나 말 등의 가축을 볼 수 있는 곳들도 있어 어슬렁거리며 관광객 행세를 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변덕스러운 유콘의 날씨 탓인지 점심을 먹고 나온 그 짧은 시간에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지만, 유콘의 황량한 풍경이 오히려 회색 하늘과 더 잘 어울리는 듯도 하다.
§자그마한 카리부 크로싱의 한편에서는 초기 정착민들의 마을을 재현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뒤로 염소와 말 우리, 썰매용 개를 위한 축사 등이 마련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익숙한 아기 염소들은 그다지 겁도 먹지 않고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리부 크로싱을 떠난 버스는 잠시 후 카크로스에 도착했다. 화이트 패스의 종착지인 카크로스는 워낙 작아서 마을이 아닌 커뮤니티로 불리는데, 나레스 호수를 가로지르는 붉은 다리와 기차 한 대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이다. 결국 기차를 타나 버스를 타나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하고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면 그냥 산악열차를 타고 왔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어차피 영원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본 풍경이 더 아름다웠을 거라는 정신 승리에 가까운 자기 위로나 혹은 보지 못한 풍경이 더 예뻤을 거라는 무의미한 후회를 하기보다, 그저 우리는 각자 다른 풍경을 보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무엇을 보고 느끼든 그 감정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기에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내가 본 것이 무엇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카크로스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기차와 다리. 한때는 꿈을 싣고 달렸을 기차는 이제 스캐그웨이와 유콘을 오가며 관광객들의 추억을 나르고 있다. 자유 여행이라면 좀 더 시간을 내어 근처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막과 타기시 호수 등도 함께 둘러보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카크로스를 떠난 버스는 속도를 내어 스캐그웨이로 돌아갔다. 언제나 느끼지만 돌아가는 버스는 늘 올 때보다 빠르게 달린다. 그러나 속도에 비례하여 멀어지기에 너무 거대한 유콘의 풍경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며 눈앞에 머무르다 버스가 스캐그웨이의 짙은 안갯속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마침내 서서히 사라졌다. 내일 이곳을 찾는 사람은 또 다른 풍경을 보며 나와는 다른 느낌을 안고 떠나겠지만, 그 모습은 한결같이 아름다울 것임을 나는 믿는다.
§창밖으로 바라본 유콘의 풍경. 회색 산들이 주변의 화려한 단풍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어 마치 판화나 우키요에처럼 보이기도 한다. 입체감이 사라진 모노톤의 풍경이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궂은 날씨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내게는 충분히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