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Oct 17. 2022

아쉽지 않은 작별은 없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빅토리아

배가 알래스카에서 멀어지자 스캐그웨이에서의 우중충한 날씨가 마치 거짓말 이기라도 한 것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공기는 싸늘해도 햇살 덕분에 많이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듯한 핫텁에 몸을 담그고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기도 하고, 다른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 승객들의 대부분이 노인이라 다들 대단한 친화력으로 말을 걸어왔다. 노인들은 어느 나라에 가나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거부감이 없는 듯하다 - 시간을 보내는 사이 배는 마지막 기항지인 캐나다의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우선 마차를 타고 마을을 빠르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찰스턴에서 마차를 타지 못한 을 일 년 내내 불평하던 남편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익스커션이지만, 주요 관광지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작은 도시이지만 영국풍의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기도 하고 거리마다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잘 정돈된 예쁜 유럽 도시 같은 분위기이다. 우리가 크루즈에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는데, 그 때문에 영연방인 캐나다에도 가는 곳마다 조기(弔旗)가 걸려 있었다. 조기는 여왕의 서거일부터 장례식날까지 열흘간 게양된다는데 왕이 없는 한국인으로서는 영국인의 추모 열기도 생소한 판국에, 하물며 별도의 대통령을 가진 독립국가 캐나다에서까지 오랫동안 추모를 하는 것이 약간 신기하게도 느껴진다.  


§ 빅토리아의 주요 관광지 Top 3에 해당하는 페어몬트 호텔과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의사당, 그리고 이너 하버. 빅토리아에서는 범고래를 볼 수 있어서 이너 하버에서 출발하는 고래 관찰 투어에 참가하는 관광객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고래는 뭐니 뭐니 해도 거대한 혹등 고래지.


마차 위에서 도시를 한번 간단히 훑어본 우리는 투어가 끝난 후 거리를 걸으며 천천히 빅토리아를 감상하기로 했다. 도시가 아기자기하고 깨끗해서 그런지 간간히 영화 촬영 중인 스태프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는데, 특히 오크 베이라는 거리는 식상한 줄거리로 유명한 홀마크 영화의 인기 촬영지라고 한다. 미국과 가까우면서도 풍경은 이국적이라 영화 관계자들이 많이 선호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북쪽에 있지만 알래스카에 있다 내려온 탓인지 혹은 구름에 방해받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햇살 탓인지 공기가 따사롭게 느껴진다. 나는 빅토리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수제 초콜릿 가게에 들러 다크 초콜릿을 하나 사서 커피와 함께 먹으며 거리를 걷다가, 가을꽃이 만발한 거리의 벤치에 앉아 햇살을 즐기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나치게 달지 않아 입에 딱 맞는 초콜릿은 혓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고, 따듯한 커피 한 모금에 내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 빅토리아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토템 폴과 만개한 가을꽃들. 왼쪽 아래는 다크 초콜릿이 무척 맛있었던 수제 초콜릿 가게 <Roger's Chocolate>로 제품들마다 공정무역 상품임이 명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는 캐나다 판 스타벅스나 던킨 도너츠 같은 느낌의 <Tim Hortons>.


우리는 잠시 다운타운을 벗어나 빅토리아의 전망을 보기 좋다는 톨미산에 올랐다. 톨미산은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깝지만 그래도 바람은 제법 세차다. 바람이 한 번씩 휘몰아칠 때마다 갈색 풀들이 쏴아아 하고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산 아래는 알록달록한 꽃들 덕분에 화창한 봄 같은데, 산 위는 빛바랜 풀들 때문인지 늦가을 같은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마차를 타고 잠시 들렀던 비콘 힐 공원의 풍경도 비슷했던 것 같다. 가을이 깊이 내려앉은 갈색 들판 너머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무척 아름다웠다. 꽁꽁 여민 옷깃 사이로 기어이 파고드는 바람에 속이 허해지는 쓸쓸함이 빅토리아의 가을 바다에 담겨 있었다. 나는 이 들판과 산 위에서 이곳의 진짜 가을 풍경을 만끽하다가 너무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왔다.


§ 비콘 힐 공원에서 바라본 해변가의 모습. 언뜻 보면 제주도의 가을 바다 같은 모습이다.


톨미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야경을 보기 위해 이너 하버 근처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내며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해가 많이 짧아진 탓에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금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너 하버의 수면에 반사된 페어몬트 호텔의 아름다운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일렁인다. 낮에 걸었던 그 거리인데도 태양이 사라지고 노란 조명이 하나둘씩 불을 밝혀오자 새로운 밤 풍경이 펼쳐진다. 대낮처럼 눈부시지는 않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이 고요하게 빛난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걸어 이미 익숙해진 거리인데도 왠지 떠나기가 아쉬워 크루즈를 향해 돌아가는 동안 여러 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수많은 여행을 하고도 미련 없이 작별 인사를 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죄로 오늘도 돌아가는 발걸음만 한없이 더뎌진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차가운 빅토리아의 가을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나의 등을 떠밀었다.


§ 빅토리아의 아름다운 야경.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의사당은 3,000개의 조명으로 꾸며졌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척 화려해 보인다.

이전 14화 우리는 다른 풍경을 보았을 뿐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