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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19. 2021

야구를 몰라도 즐거운 야구장 구경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장

처음 애틀랜타에 도착한 날은 마침 월드시리즈 4차전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축구의 'ㅊ' 자도 모르지만 2002년 월드컵 때 얼굴에 태극기 칠하고 모든 경기를 광장에 뛰쳐나가 관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야구를 모르는 건 관계없었다. 이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는 게 중요할 뿐. 비록 경기장에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펍에서 맥주라도 마시며 신나게 구경하고 싶었는데, 픽업을 나온 분이 우리가 묵을 호텔 근처는 밤에 돌아다니기 위험하다고 만류하셨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호텔 방에서 TV로 경기를 봤는데, 솔직히 시차 때문에 영혼이 몸에 반쯤만 걸쳐 있는 상태여서 사실상 경기를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호텔방들은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 제법 방음이 잘 된다고 느꼈던 호텔도 광분한 팬들의 환호소리는 막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브레이브스는 그날 경기를 이겼고, 며칠 후 2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우리는 애틀랜타가 연고지도 아니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 남편과 나는 각각 야구모자를 한 개씩만 챙겨 왔는데 둘 다 공교롭게도 LA 다저스의 모자였다. 딱히 다저스의 팬도 아닌데 그냥 색깔이 마음에 들어 샀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애틀랜타에 와서 쓰고 다니려니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마침 애틀랜타가 우승도 했으니 우리도 분위기에 맞춰 애틀랜타 모자를 구입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모자만 온라인으로 구입했으나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반품을 하고, 역시 몸에 착용하는 것은 직접 보고 사야 한다는 생각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장으로 향했다.


§ 주차장 맞은편의 1루측 입구와 주변 풍경. 시즌이 끝나서 야구장 문은 잠겨 있었지만 식당은 시끌시끌했다. 오랜만의 우승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여전히 분위기에 취해 있는 듯 흥겨워 보였다.


야구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밖에서 분위기만 구경하다가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념품 샵인 <브레이브스 클럽하우스 스토어>로 들어갔다. 기념품 샵에서는 오리지널 유니폼, 모자 등의 기념품과 별개로, 다양한 월드 시리즈 우승 기념 굿즈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겠다는 MLB의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남편은 브레이브스 홈팀 유니폼 모자를 골랐고, 두상이 작아 맞는 모자를 찾기 어려운 나는 키즈 코너에서 마침 딱 하나 남은 마음에 드는 모자를 발견해 구입했다. 한국에 들어오는 MLB 모자들은 대체로 사이즈가 정해져 있는데 반해, 여기는 여자용 모자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사이즈도 다양해서 맞는 모자를 구입하기 편할 것 같았다. 의류나 모자 이외에도 월드시리즈 우승 기념 티셔츠를 입은 인형 같은 귀여운 굿즈들도 많이 팔고 있었지만 두 눈 꼭 감고 가게를 나섰다.


§ 브레이브스 클럽하우스 스토어. 우리는 시즌이 끝나서 영업을 안 하거나 가게 안이 썰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예상과 달리 손님이 많았다. 내가 고른 모자는 원정팀 유니폼 모자를 약간 변형한 디자인인데, 측면의 와펜을 보니 유방암 환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인 핑크리본과 콜라보를 한 제품인 듯하다. 처음엔 A자가 핑크색이길래 여자 아이용이라 핑크색인 건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의미 있는 콜라보여서 더 기분이 좋아졌다.


올해는 이미 한 해의 시즌이 거의 다 끝난 시점에 미국에 와서 제대로 경기 한 번 보지 못했지만, 내년 시즌은 야무지게 즐겨 보고 싶다. 야구는 잘 모르지만 꼭 잘 알아야만 즐길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오늘은 야구장 바깥만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내년에는 나도 꼭 이 안에서 함께 환호성을 질러 보리라 다짐하며 돌아왔다.




그나저나 집에 돌아와 모자에 붙은 가격표를 떼려는데, 아래에 또 다른 레이블이 겹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궁금해서 떼어봤더니, 세상에. 원래 가격이 10달러나 저렴한 것이 아닌가. 월드시리즈를 우승해놓고 할인 행사를 열지는 못할 망정 그새 가격을 올리다니. 역시 돈이 최고라는 미국 사람들의 장삿속은 당할 길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핑크리본 보고 잠시 감동했던 내가 한없이 순진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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