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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26. 2021

이방인의 추수감사절과 소시지의 맛

Happy Thanksgiving

미국 생활이 처음인 우리에게는 일상의 대부분이 첫 경험이다. 오늘 맞이한 추수감사절 역시 처음.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이라고 하니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은데, 정작 문제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방인인 우리가 한 나라의 전통을 고작 몇 주만에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맞이한 미국의 명절을 평범한 하루의 휴일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다른 건 잘 모르니 음식만이라도 비슷한 걸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호박파이를 찾아보았다.


이들에게 가을은 호박의 계절인지 핼러윈부터 추수감사절까지는 호박의 향연이라 가는 곳마다 호박 장식이 가득한데, 특히 호박파이는 대표적인 명절 음식이라기에 한 번 맛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호박파이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어디가 맛있는 가게인지 알 수가 있나. 하는 수 없이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평이 좋은 파이 가게들 중 미니 사이즈의 파이를 파는 곳을 찾아갔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덜컥 커다란 파이를 샀다가 입에 안 맞으면 곤란하니까. 미국은 넓은 땅덩이에 어울리게 모든 것이 커다란데 음식들도 스케일이 남달라서 대체로 한 달은 먹을 것 같은 사이즈의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다. 파이도 미니 파이를 파는 곳은 한 군데뿐이라 기껏 찾아갔는데 아뿔싸! 호박파이는 이미 다 팔리고 없단다. 우리도 명절 음식을 미리 주문하는 것처럼 여기도 그런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가게를 나와 돌아가려다 한 군데만 더 들러 보기로 했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가게에 다행히 호박파이가 남아 있어 큰 사이즈이지만 일단 구입했는데 어, 맛있다! 한 입 먹으면 은은한 호박 향이 입 안에 퍼지는데 많이 달지 않고 약간 떡 같은 느낌도 든다. 한편 크러스트는 버터 풍미가 가득해서 고소하면서 바삭하다. 이 맛이면 큰 사이즈여도 충분히 먹고도 모자라 또 사러 갈 수 있겠다. 일단 추수감사절 명절 음식 첫 시도는 성공이다.


§ 우리에게 성공적인 호박파이 경험을 선사한 <Southern baked pie company>. 파이 외에도 레시피북이나 파이 크러스트 믹스 등도 판매하고 있다. 파이가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는 다른 파이도 사보고 싶다. 호박파이 구입에 실패했던 첫 가게에선 그냥 나오기 아쉬워 미니 사이즈 피칸파이를 사 왔는데 맛있기는 하지만 내 입맛에는 살짝 달았다. 그래도 둘 다 아메리카노랑 먹으니 찰떡궁합이네.


파이는 일단 성공인데 다음은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건 바로 칠면조 고기. 칠면조란 녀석은 생긴 것도 어마 무시한데 크기는 더 어마 무시해서 도저히 시도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트에는 통으로 된 칠면조뿐 아니라 칠면조 가슴살만 팔기도 하는데, 이 역시 먹어본 적이 없으니 요리를 해 볼래야 해 볼 수도 없다. 추수감사절 명절 음식을 하는 식당이라도 가볼까 했으나 전부 코스요리여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십중팔구 절반도 먹지 못 할게 분명하기에 어째 본전 생각에 눈물 흘릴 것 같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작은 사이즈의 조리된 칠면조를 찾아 각종 홀푸드와 마켓을 헤메 다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추수감사절은 온 가족이 모여 먹고 마시는 명절이니 미니 사이즈를 판매할 리가 없잖은가. 설날과 추석에 만드는 방대한 양의 전과 거대 칠면조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깨끗이 단념하고 대안을 찾았으니 그것은 바로 칠면조 소시지. 뭐가 되었든 칠면조를 먹기만 하면 되지.


§ 우리가 먹고 싶었던 칠면조(왼쪽)와 실제로 먹은 칠면조(오른쪽) 사이의 간극은 미대륙만큼이나 거대하지만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짭조름한 소시지의 맛. 실제 칠면조 고기도 그다지 맛있지는 않다는 평이 많아 크게 아쉽지는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본디 새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치킨 조차도 썩 즐기지 않는 편이라 추수감사절 대표 음식이 칠면조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소고기였으면 식탁을 치며 오열했을지도.


추수감사절에는 와플 하우스 같은 패스트푸드 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렇다고 와플 하우스를 가는 건 마치 한국에 온 외국인이 추석 때 그래도 한국 음식을 먹으며 명절 분위기를 느껴 보겠다고 김밥천국을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져 절대 피하고 싶었다. 하다 못해 김밥천국은 종류라도 다양하지 와플 하우스는 생각만 해도 외국 생활의 서러움이 두 배는 커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선택한 호박파이 포장과 칠면조 소시지인데 절반은 성공했으니 이만하면 아주 망친 것은 아니다. 나머지 절반은 살다 보면 또 채워갈 기회가 있겠지.




며칠 전 운전면허증을 받았을 때 드디어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했는데 명절이 되니 여전히 우리는 이방인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때로는 한 발 물러서 관망할 수 있는 이방인의 삶도 나쁘진 않다. 명절 때면 가족 간의 갈등이 커지는 건 이곳도 똑같아 추수감사절에 귀향을 꺼리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그런 걱정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 이해가 깊어지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갈등이 잦아지는 건 그만큼 접점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방인이라 이해가 얕기에 놓치는 부분이 많고 그래서 좋을 때도 있지만, 반면 그만큼 이 사회와의 거리감이 느껴져서 가끔은 외롭다. 외롭지 않으면서 갈등은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상대가 사람이든  한 사회이든 관계란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인생의 숙제 같다. 그러나 때론 갈등은 상대의 진면목에 다가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동안 가끔은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건 아마도 칠면조 소시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짜 칠면조의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비록 진짜 칠면조가 질기고 퍽퍽해서 영 내 입에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도 말이다. 오늘의 우리는 비록 짭조름한 소시지를 베어 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보다 깊은 미국 사회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물론 그 맛이 근사하다면 금상첨화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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