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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28. 2021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줘요

미국에서 차량구입하기

미국에 들어온 후 한 달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래도 드디어 정착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살 곳을 마련하고, 입국을 신고하고, 신분증을 받았으니 이제 차를 구입할 차례이다. 이동의 자유를 대단히 갈망해서가 아니라 없으면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단계인데, 문제는 최근 반도체 수급 부족으로 인해 중고차 가격이 크게 뛴 데다 새 차를 구입한다 해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우리는 먼저 믿을 수 있는 중고차 거래 업체인 카맥스나 카바나 등을 둘러보았으나 선뜻 구입이 어려웠다. 지금 오를 대로 오른 값을 주고 중고차를 샀다가 내년에 반도체 공급이 원활해져 가격이 안정될 경우 손실이 크게 발생하는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민 끝에 차라리 새 차를 구입하기로 했다. 새 차라면 감가가 발생한다 해도 크지 않을 테니 반도체 공급 상황에 그나마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후보군은 중고차 가격 방어가 가장 잘 되는 혼다나 렉서스 등의 일본차였는데 마침 렉서스에 프리미엄이 없는 차량이 나왔다고 하여 당장 매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예약을 걸어 두었는데도 매장 도착을 5분 앞두고 그 사이에 다른 손님이 사가버렸다고 하네. 미국은 예약이고 뭐고 먼저 돈 내는 사람에게 그냥 판매를 해버리는 모양이다. 상심해 돌아가려는 차에 며칠 후 입고 예정인 차가 한 대 있으니 그 차라도 계약하라는 제안을 받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고민하다가 또 다시 눈앞에서 놓쳐버릴 수는 없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차를 계약했으니 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한국에서의 운전경력이 20년이라 해도 미국에서는 이제 막 면허를 받은 초보운전자 취급이라 견적을 받으니 헉 소리 나는 보험료가 나왔다. 놀라서 알아보니 미국은 보험사와 에이전트에 따라 보험료가 아주 크게 차이가 나니 최대한 많은 곳에서 견적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는 가이코, 스테이트팜, 프로그레시브, 올스테이트 등에 견적을 받았는데 가장 비싼 회사와 싼 회사의 가격 차이가 6개월에 무려 1,000달러가 넘었다(미국은 우리와 달리 차량보험을 6개월 단위로 계약한다). 우리는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가격의 스테이트팜을 선택해 가입했는데, 온라인으로 안전운전교육 같은 것을 받으면 10% 할인해 준다고 하여 교육을 받겠다고 했다. 교육은 6시간 정도 이루어지는데 도로교통법이나 표지판 같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도 있지만, 대다수는 "Q. 과속으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발생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속도를 줄인다"같은 상식적인 내용의 교육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


§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보험사에 제출하기 위해 받은 교육 이수 확인서. 그런데 교육 내용이 대체로 노인 대상 안전운전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약간의 굴욕감을 느꼈다. 한편, 나는 이 교육이 도로교통공사 같은 데서 하는 무료교육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유료였다. 수업료를 내도 보험료 할인을 받는 것이 더 이득이라 이수하긴 했으니 보험사와 일종의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보험을 가입하고 차를 인도받으니 예상 밖의 신차 구입에 잔고는 바닥났어도 기분은 좋아졌다. 운전면허를 딴 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줄곧 세단만 몰아왔지만 - 사실 지금도 나는 차는 무조건 세단이라고 생각한다 - 미국에 있는 동안은 시험 삼아 SUV를 타보기로 했다. 이유는 자전거를 쉽게 싣고 다니기 위해서 인데, 일 년 동안 타 본 후 잘 맞으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SUV를 사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세단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차량이 나올 때까지 닷새 동안은 ES350 데모카를 제공받아 운전했는데 달릴수록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딱 내 스타일이었다 - 다만 처음 가속이 느려서 사람에 따라서는 답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반면 RX350은 가볍고 민첩해서 역동적인 느낌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별로 내 취향이라는 느낌은 없다. 뭐, 타다 보면 나와 궁합이 맞는지 어떤지 차차 감이 오겠지.


§ 우리의 새 차 렉서스 RX350. 몇 년 전 페루에 여행을 갔을 때 사온 드림캐쳐를 한국에 있을 때도 차에 잘 걸어 두었었는데, 미국으로 올 때도 챙겨 와서 룸미러에 부적처럼 걸어 두었다. 나쁜 꿈들은 가져가 준다는 드림캐쳐가 혹시 모를 나쁜 일들도 가져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꽤 오래전 경주에 여행을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불상 앞에 차키를 두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정성으로 안전운전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제와 나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니 사람이란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하는 생각에 실소가 새어 나온다.




누군가 그랬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미국에서는 차가 또 하나의 신발이라고 하던데 좋은 차를 샀으니 나를 좋은 데로 데려가 줄까? 어쩌면 그 반대일 것 같다. 다 찌그러진 깡통 차여도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면 그 차가 좋은 차 아닐까.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남편이 몰고 나왔던 낡은 차가 떠오른다. 창문도 손으로 돌려 내려야 하는 아주 오래된 차였는데도 전혀 부끄러움 없는 모습이 소탈해 보여 참 좋았다. 좋은 남편을 데려온 그 차가 좋은 차였던 것처럼, 이 차도 브랜드나 가격을 떠나 우리를 낯설고도 즐거운 장소들로 데려다 줄 차 이기에 좋은 차일 거라고 믿는다. 이곳에서 일 년 동안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고 떠날 수 있도록 부디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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