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을 통일하라

낯선 단위의 홍수에서 허우적대며

by 더스크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이룬 업적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제일 잘한 것 중 하나가 도량형의 통일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도 막연하게 느꼈으나 미국에 와서 매일같이 겪는 사소한 불편함의 원인이 도량형에 있으니 새삼 도량형 통일의 중요성이 피부로 와닿는다. 아닌 게 아니라 내비게이션이 몇 마일 앞에서 우회전하라는데 그게 이번 골목인지 다음 골목인지 감을 잡을 수 없고, 마트에서 고기 한 팩을 사도 몇 파운드가 몇 그램인지 퍼뜩 계산되지 않으니 싼 건지 비싼 건지 통 모르겠으며, 운전면허 신청을 하려 키와 몸무게를 입력할 때도 몇 피트인지 확인하기 위해 단위 변환기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단위를 쓰는 것이 일상생활에서야 단지 불편함에 그친다지만, 공학에서는 치명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서 단위 착오로 인해 1983년에는 에어 캐나다 불시착 사건이, 1999년에는 화성 기후 궤도선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의 교재들이 늘 두 가지 단위 버전으로 출판되는 모양이다. 이토록 중요한 단위를 국제 표준과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미국 단위를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의 주소체계 변경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행정구역 중심으로 짜여진 번지 주소보다 도로의 구성을 바탕으로 한 도로명 주소가 길 찾기 쉽다고는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주소를 바꾸는 데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은 대단했고, 주소체계가 개편된 지 7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번지 주소를 선호하거나 도로명 주소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서 많은 웹사이트에서 우편번호 검색 시 도로명 주소와 함께 번지 주소도 검색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주소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럴진대 단위 전체를 바꾸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국제 표준으로 단위를 변경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얼마나 싫었으면 이에 대해 일부 우파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단다.


국민적 저항을 떠나 미국식 단위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절대 강자인 미국이 스스로 단위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서 다른 국가들이 맞춰 주는데 뭐하러 사서 수고를 하겠는가. 어찌 되었든 힘이 있고 볼 일이다. 현재 미국식 단위를 사용하는 나라는 미국 이외에 미얀마와 라이베리아 정도뿐이라던데, 내가 힘이 없으면 힘 있는 친구라도 사귀어야 하는 건지 이들 역시 미국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내다 버렸을 인치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의류업체에 종사하는 지인은 미얀마 공장에 제작을 맡겼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센티로 작성된 도안을 넘겼는데 미얀마인들이 인치로 재단하는 바람에 수 억 원어치의 원단을 날려먹은 것이다. 사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비행기를 떨굴 일도, 수 억 원을 날릴 일도 없고 기껏해야 주문한 가구가 방에 안 들어가는 정도이겠으나 도량형의 통일은 이렇게나 중요하다. 대부분 작게, 가끔은 크게.


이 가끔 크게 발생하는 문제를 막기 위해 NASA에서는 더 이상 미국단위계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기왕 그렇게 한 거 한걸음 더 나아가 대부분의 작은 문제도 줄여 보려는 노력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병기(倂記)라는 해법이 있으니 말이다. 영어 하나만 표기된 표지판이나 설명서에 익숙한 미국인들이기에 함께 쓰기를 떠올리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국제표준으로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옆에 같이 써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니까.





§ 갤런과 온스 옆에 리터를 함께 기입한 우유와 샐러드 소스. 다른 것들도 좀 함께 기입해 주면 좋을 텐데. 한국이라면 단위 입력이 필요한 웹 페이지에는 자동 변환이나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을 넣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줄자가 필요해 하나 구입했는데, 마침 줄자가 없었으니 한국에서도 잘 사용할 수 있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당연하게도 줄자는 인치로 되어 있어 한국에서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번은 새로 구입한 에어프라이어의 온도가 400도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는데 섭씨로 환산하면 204도이니 한국 제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직 다른 단위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 혼자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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