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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Dec 26. 2021

미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인사

크리스마스 캐럴과 달고나

미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아주 특별하고도 여유가 흘러넘치는 하루가 될 터였다, 계획대로라면. 그러나 예상대로만 흘러가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한 신의 지나친 배려 탓인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상은 빗나가 주었다. 석 달 전 보낸 이삿짐이 23일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워낙 배송이 늦어지는 탓에 해를 넘길 거란 예상과 달리 빨리 짐을 받게 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파손된 물건 하나 없이 잘 도착해 준 것도 너무 감사했다. 문제는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한 업보를 온몸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는 것. 나는 짐을 정리하며 그간의 물욕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한편, 앞으로 이 후회를 두 번은 더 해야 한다는 사실 - 일 년 후 한국으로 보낼 짐을 쌀 때와 그 짐을 풀 때 - 에 몸서리치며 산더미처럼 쌓인 짐 상자들 사이에서 망연자실했다. 상황이 이러니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온종일 짐 정리에 시달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몇 주전 예약해 놓은 연극이 있어 이를 핑계로 난장판이 된 집을 내팽개쳐 두고 일단은 집을 나섰다.


미국의 크리스마스 전통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보는 거라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예약을 했는데, 하도 어릴 때 읽은 책이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상태로 연극 대사를 다 알아들을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으로 극장을 향했다. 내심 극장에 애들만 바글거릴까 걱정했는데 어른끼리 온 관람객들도 아주 많았다. 연극 내내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와서 성탄절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연극의 메시지도 물론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았고. 크리스마스 때 <크리스마스 캐럴>을 보는 것이 혹자에게는 클리셰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디 인간사의 핵심은 진부하리 만큼 단순한 것 아닐까 한다.

§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언제나 약자에 대한 따듯한 연민과 공감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메시지는 간단명료하다. 가족과 사랑. 한 해에 한 번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크리스마스에 등 떠밀려서라도 평소 못하던 사랑을 전해 본다.


연극이 끝난 후 <아발론>이라는 상가에서 예쁜 트리를 구경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주방이 엉망이라 도저히 집에서 식사를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베트남 식당을 갔는데 너무 맛있어서 안 먹었으면 억울할 뻔했다. 한편 집에서도 여전히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친구들과 약속한 온라인 달고나 대회가 25일 아침 - 한국 시간으로는 25일 밤 - 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고나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미리 만들어 둘 생각이었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네. 서너 번을 망친 후 인터넷을 보고 간신히 성공해서 달고나 두 개를 준비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영상통화를  하며 야심 차게 달고나 게임을 시작했는데 5초 만에 탈락. 고생해서 만든 달고나가 아까워서 달고나 라테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네스프레소가 와서 이런 거라도 해 먹지 싶어 시기적절하게 도착해 준 이삿짐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 너무 쉽게 부서져버린 나의 하트. 조각난 하트에 침을 발라 붙여서 라테 위에 얹어 먹었다. 서울팀은 게임 시작 때 이미 만취상태라며 불공정을 호소했는데, 정작 일등은 음주 여부를 떠나 네모를 고른 사람이 차지했으니  암만 봐도 불공정한 게 맞는 것 같다.


친구들과의 반갑고도 즐거운 영상통화를 마친 후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허리가 아작이 날 것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 행복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뭔가 잘 안 되고 꼬이는 것 같았던 일들도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면 매 순간이 행운으로 가득했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고된 크리스마스였음에도 나는  어느 때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속은 무척 따듯했다. 포근한 온기 안에 행복한 내일에의 축복이 깃들어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기분 좋은 몽롱함에 빠져 들었다.


§ 위에서부터 차례로 뉴욕과 우리 마을과 아발론의 크리스마스 장식.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축복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소박함과 화려함을 떠나 동일하게 아름답다. 모두들 예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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