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아주 특별하고도 여유가 흘러넘치는 하루가 될 터였다, 계획대로라면. 그러나 예상대로만 흘러가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한 신의 지나친 배려 탓인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상은 빗나가 주었다. 석 달 전 보낸 이삿짐이 23일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워낙 배송이 늦어지는 탓에 해를 넘길 거란 예상과 달리 빨리 짐을 받게 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파손된 물건 하나 없이 잘 도착해 준 것도 너무 감사했다. 문제는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한 업보를 온몸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는 것. 나는 짐을 정리하며 그간의 물욕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한편, 앞으로 이 후회를 두 번은 더 해야 한다는 사실 - 일 년 후 한국으로 보낼 짐을 쌀 때와 그 짐을 풀 때 - 에 몸서리치며 산더미처럼 쌓인 짐 상자들 사이에서 망연자실했다. 상황이 이러니 크리스마스이브를즐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온종일짐 정리에 시달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몇 주전 예약해 놓은 연극이 있어 이를 핑계로 난장판이 된 집을 내팽개쳐 두고 일단은 집을 나섰다.
미국의 크리스마스 전통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보는 거라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예약을 했는데, 하도 어릴 때 읽은 책이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상태로 연극 대사를 다 알아들을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으로 극장을 향했다. 내심 극장에 애들만 바글거릴까 걱정했는데 어른끼리 온 관람객들도 아주 많았다. 연극 내내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와서 성탄절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연극의 메시지도 물론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았고.크리스마스 때 <크리스마스 캐럴>을 보는 것이 혹자에게는 클리셰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디 인간사의 핵심은 진부하리 만큼 단순한 것 아닐까 한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언제나 약자에 대한 따듯한 연민과 공감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메시지는 간단명료하다. 가족과 사랑. 한 해에 한 번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크리스마스에 등 떠밀려서라도 평소 못하던 사랑을 전해 본다.
연극이 끝난 후 <아발론>이라는 상가에서 예쁜 트리를 구경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주방이 엉망이라 도저히 집에서 식사를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베트남 식당을 갔는데 너무 맛있어서 안 먹었으면 억울할 뻔했다. 한편 집에서도 여전히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친구들과 약속한 온라인 달고나 대회가 25일 아침 - 한국 시간으로는 25일 밤 - 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고나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미리 만들어 둘 생각이었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네. 서너 번을 망친 후 인터넷을 보고 간신히 성공해서 달고나 두 개를 준비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영상통화를 하며 야심 차게 달고나 게임을 시작했는데 5초 만에 탈락. 고생해서 만든 달고나가 아까워서 달고나 라테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네스프레소가 와서 이런 거라도 해 먹지 싶어 시기적절하게 도착해 준 이삿짐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너무 쉽게 부서져버린 나의 하트. 조각난 하트에 침을 발라 붙여서 라테 위에 얹어 먹었다. 서울팀은 게임 시작 때 이미 만취상태라며 불공정을 호소했는데, 정작 일등은 음주 여부를 떠나 네모를 고른 사람이 차지했으니 암만 봐도 불공정한 게 맞는 것 같다.
친구들과의 반갑고도 즐거운 영상통화를 마친 후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허리가 아작이 날 것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 행복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뭔가 잘 안 되고 꼬이는 것 같았던 일들도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면 매 순간이 행운으로 가득했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고된 크리스마스였음에도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속은 무척 따듯했다. 포근한 온기 안에 행복한 내일에의 축복이 깃들어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기분 좋은 몽롱함에 빠져 들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뉴욕과 우리 마을과 아발론의 크리스마스 장식.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축복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소박함과 화려함을 떠나 동일하게 아름답다. 모두들 예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