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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Nov 08. 2021

호된 신고식

한 번쯤은 사고를 칠 때도 됐지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유독 거품 목욕을 자주 한다.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거품으로 가득한 욕조에 누워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무척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 집에서 거품 목욕을 하면 뒷 처리가 만만치 않아서 기껏 목욕을 한 보람도 없이 욕조 청소를 하느라 도로 땀범벅이 되어 버리기 일쑤다. 사람이 거품 목욕을 할 때도 그런데 집이 거품 목욕을 한다면 어떨까?


사건은 주방에서 터졌다. 여느 미국 집들과 마찬가지로 1년간 렌트한 집에는 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 같은 주방기기가 이미 갖춰져 있었는데 오랜 기간 세입자들이 사용해서 그런지 별로 깨끗하지는 않았다. 냉장고는 마침 주인이 새로 구입해 놓은 것이라 상관없었고, 오븐은 작은 에어프라이어를 마련하면 별로 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전자레인지도 깨끗해서 사용하기에 무리가 없었는데, 문제는 식기세척기였다. 물 빠지는 곳이 너무 지저분해서 그냥 사용하기 영 꺼려졌다. 물론 손으로 설거지를 해도 되지만 한국에서도 식기세척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왕 있는 기계를 잘 닦아 써볼 심산으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박박 문질러 닦은 후 빈 기계에 세척 버튼을  눌러 놓고 잠시 2층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1층으로 내려갔던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빨리 내려와 봐! 여기 큰 일 났어!!"


놀라서 내려간 내 눈앞에 펼쳐진 건 거품목욕 장면이었다. 다른 점은 등장인물이 우아한 여주인공이 아닌 망연자실한 아줌마라는 점과 작은 욕조가 아닌 커다란 집(엄밀히 따지면 주방 구역)이 무대라는 것. 전혀 아름답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 내 옆에서 식기세척기는 열심히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절망 따위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원인은 수세미에 묻힌 세제였다. 그제야 한국에서 식기세척기를 샀을 때 매뉴얼에 일반 세제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쓰여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서둘러 식기세척기를 끄고 마룻바닥과 식기세척기 안에 고인 거품 반 물 반을 퍼내기 시작했다. 아직 가재도구가 채 마련되지 않아 바가지로 사용할 만한 것 도 없어 손과 냄비, 그릇, 컵 등을 닥치는 대로 동원했다. 수도 없이 퍼내고 닦아도 식기세척기는 한번 헹굼을 돌릴 때마다 다시 거품을 어 냈다. 그래도 계속해서 퍼내고 헹구어 내기를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거품이 사라졌다. 깨끗해진 식기세척기와 마룻바닥을 보니 그제야 안도가 되면서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부여잡고 거실에 주저앉자 녹초가 된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한국에서 이런 일이 안 생긴 게 어디야. 한국 아파트였으면 아랫집에 물 다 새고 난리였을 걸"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한국이었다면 우리 집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불행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아, 물론 한국에서 쓰던 제품은 내부통세척 기능이 있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가 애시당초 없기도 하다마는. 어찌 되었든 오늘의 에피소드는 새 집으로 이사 온 신고식이라 받아들이고, 사고가 비교적 빨리 수습된 사실에 감사하며 아마존에 들어가 식기세척기 내부 세척용 전용 클리너를 주문했다.


§ 거품으로 가득했던 주방. 오른쪽 아래의 검은색 기계가 문제의 식기세척기이다. 상당히 구형 모델인 듯 내부 세척 기능은 없는데 식기세척은 잘 된다. 본연의 기능에 집중해 제작한 모양. 거품 바다의 현장은 정신이 없어 찍어두지 못했다. 나중에 보면 많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매 순간 기록하지 못한 일들은 늘 후회가 된다. 그런데 기록을 하다 보면 그 순간의 감정을 놓치기 때문에 기록이 반드시 옳은 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늘 양자택일의 연속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에 이어 식기세척기까지 매일 사고는 터지지만 또 그럭저럭 해결은 된다. 내일도 또 다른 문제는 생기겠지만 그 역시 어떻게든 풀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에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을 일부러 찾아와 맞닥뜨리는 것이 힘겹기도 하지만 무탈히 넘겼을 때의 보람도 크다.


매일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매일 성취감을 맛본다는 의미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다시 하면 되지.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할 수 있는 내일이 있기에,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도 다행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오늘도 낯선 땅에서의 하루를 평안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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