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Dec 19. 2021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꽃을 삽니다

미국 화훼 도매상가에서

늘 날씨가 좋은 애틀랜타에 오랜만에 비 예보가 떴다. 미국의 집은 아파트와 달리 바로 위에 지붕이 있어 그런지 빗소리가 유독 선명히 들린다. 후드득후드득 물방울 듣는 소리가 경쾌하다. 나는 문득 빗소리를 들으며 꽃을 만지고 싶어져 꽃가게를 찾아 나섰다. 집 근처에는 화훼 도매상가가 없어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상가들 중 비교적 평이 좋은 곳으로 일단 출발했다. 마음에 드는 꽃이 많으면 좋으련만.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상가는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절화 코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그린 소재들이 싱그럽다. 종류도 제법 다양해서 잎을 좋아하는 나는 선택의 폭이 넓어 기뻤다. 절화의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는데 아네모네, 러넌큘러스, 작약, 튤립 등이 상태도 아주 좋고 예뻤다. 도매시장이라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아 얼마나 사야 적당할지 감이 오지 않아 고민하다가, 일단 처음이니 간소하게 만들어 볼 생각으로 러넌큘러스 두 종류와 왁스 플라워만 들고 계산대로 갔다.


§ 도매상가이니만큼 매장 규모는 크지 않아도 생화, 분화, 건조화를 모두 갖추고 있고 화기나 각종 부자재들도 판매하고 있다. 꽃 값에 비해 화기들은 비교적 저렴해서 4~5달러면 살 수 있다. 미국은 공산품 가격은 비교적 합리적인 것 같다.


"What!?" 미국에 온 후로 혹시 총이라도 맞을까 봐 대화 시 감정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는데 충격과 공포의 미국 꽃값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계산대 점원이 말해준 가격은 한국의 두배가 넘었다. 점원은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꽃이라 비싸다고 해명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배는 너무하잖아. 가격을 듣고 망설이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오늘은 일단 사자고 했다. 나는 남편의 말에 떨리는 손으로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40분 내내 한국 화훼 도매상가의 규모와 가격을 떠올리며 미국의 꽃값을 성토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제일 큰 고속버스터미널 화훼상가와 이곳을 비교하는 것이 공정하지는 않은 것 같아 크기 비교는 멈추었다. 그리고 언젠가 읽은 미국에 적응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태도가 한국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이라는 글을 떠올리며 가격 비교도 그만 하기로 했다. 나라마다 임금, 물류, 부동산 등 모든 것이 다르니 어쩔 수 없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무의미한 비교는 스트레스만 줄 뿐이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꽃을 샀지만 미국에 있는 동안은 아무래도 특별한 날에만 꽃을 즐겨야 할 모양이다. 환경이 달라졌으니 생활도 달라져야지 별 수 있겠나. 이 또한 적응의 과정이겠지.


§ 뜻하지 않게 초 럭셔리가 되어 버린 화병 꽂이. 그래도 비싼 만큼 꽃들의 상태는 아주 훌륭하다. 비싼 꽃들이 아까워서 평소보다 두 배의 공을 들여 정성스레 컨디셔닝 하고, 부러진 아이들도 작은 컵에 고이 담아 두었다. 다행히 러넌큘러스와 왁스 플라워는 수명이 기니까 자주 물을 갈아 주면서 오래도록 봐야겠다.




그래도 꽃이 있으니 단숨에 집안에 생기가 도는 듯하다. 식탁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미소가 절로 피어오르네. 역시 꽃은 있어야겠다. 사실 미국의 모든 꽃이 비싼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미국스러운 총 천연색 샤랄라 꽃들은 대체로 한국과 비슷한 가격이다.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닐 뿐. 당장 일어나 디스코라도 출 것 같은 저 신나는 컬러의 저렴한 꽃들을 사서, 내 마음에 드는 차분한 스타일로 꽂는 방법이 없을지 계속해서 고민 중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꽃을 살 수 있도록.


§ 화병 꽂이는 배운 적이 없어서 엉망이지만 인터넷에 이런 영상이 많이 올라오길래 나도 한번 만들어 봤다. 언젠가 브런치 글에 쓴 대로 조명이 노래서 영상도 노랗게 찍히고 말았다. 다음에는 화이트 밸런스를 좀 조정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로에도 색깔이 있다면 분명 파란색 일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