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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Dec 01. 2021

위로에도 색깔이 있다면 분명 파란색 일거야

늦가을 오후의 러니어 호수 산책

우리 집에는 커튼이 없다. 한국처럼 벽 하나를 가득 메우는 커다란 창이 없어서 그런지 이 집에는 작은 창문에 블라인드만 설치되어 있다. 블라인드로 아침 햇살을 가려주기는 역부족이라 수면안대 틈으로 파고 들어오는 태양빛에 마지못해 눈을 뜨는데, 20년 만에 알람 없이 맞이하는 매일 아침이 낯설면서도 반갑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블라인드 사이로 날씨를 체크한다. 애틀랜타는 날씨가 좋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 이곳에 머무른 한 달 동안 찌푸린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 매일 아침 화창한 하늘을 보며 '아, 오늘도 정말 날이 좋다!'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 맑은 하늘을 보고 매일 똑같은 감탄을 한 후 아침을 먹고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하늘은 파랗다. 이보다 더 파랄 수 없을 만큼. 지난 블랙프라이데이 때 나를 위해 산 물건이라곤 양말과 장갑 한 켤레뿐이지만, 그래도 큰맘 먹고 구입한 게 있으니 진작부터 사고 싶었던 고프로이다. 자전거를 탈 때도,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가격이 만만찮아 고민만 하고 있다가,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때 싸게 나온 물건을 발견해 부랴부랴 주문을 했더랬다. 날이 좋으니 마침 도착한 고프로를 들고 산에 가 볼까 했으나 남편이 어제 운동을 무리했는지 무릎이 약간 아프다고 하여 산은 포기하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인자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자(智者)에 가까운 지 물을 더 좋아하는데, 바다는 차로 4~5시간을 가야 하기에 20분 거리에 있는 호수를 가기로 했다. 내일이면 12월인데도 바람에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어 산책을 하기에 좋은 날이기도 했다.



우리가 찾아간 호수는 <Sydney Lanier>라는 호수인데 꽤 커서 뷰포드, 커밍 등 여러 시에 걸쳐 있다. 호숫가를 따라 공원이 여러 군데 있는데 공원마다 요트를 타기 좋은 곳도 있고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는 곳도 있어서 각자 원하는 액티비티에 따라 골라서 가는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산책이 목적이라 가장 가까운 공원인 <Van Pugh North Park>을 찾아갔다. 평일의 공원은 한산해서 사람이 거의 없고 한 두 명만이 요트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좋아 요트가 시원하게 물 위를 달렸다. 호수는 맑고 투명했다. 햇살에 반짝이며 일렁이는 물결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집어 넣었는데 차갑지 않고 적당히 시원했다. 하늘도 호수도 더 할 수 없이 깊고 파랬다. 어느 쪽으로 몸을 던져도 풍덩하고 빠져들 만큼. 한 동안 호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에도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한국에서의 지쳤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자연은 늘 이렇게 내게 파란색의 위로를 건넨다.


§ 고프로로 처음 찍어본 동영상. 처음이라 촬영도 편집도 많이 서투르다. 빨리 익숙해져서 풍경도 추억도 더 잘 담아내고 싶다.




나는 물을 좋아해서 내게 위로는 파란색이다. 아마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위로는 초록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자연이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지갯빛이든 혹은 흰색이든 각자의 취향에 어울리는 색의 위로를 받겠지. 모두가 저마다 맞는 위로의 색이 있어서  파란색의 위로가 다른 사람에게는 별 다른 감흥이 없을지라도, 누군가는 나처럼 가슴 시원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의 풍경을 보낸다.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처럼 글에 하늘 한 조각, 호수 한 스푼, 바람 한 움큼을 담을 수 있다면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하긴, 마법사가 아니어도 좋은 작가라면 글에 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겠지. 머글의 글솜씨라 조금 슬퍼지려 하네. 다시금 내게 파란색의 위로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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