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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Feb 04. 2022

게임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궁서체와 같은 진지함으로

영어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불성실을 반성하는 한편 새롭게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하여 게임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져왔으나 한동안 팬트리에 처박아 두었던 영어 게임들인데 힘겹게 이고 지고 온 수고가 아깝기도 하고 기왕 공부하는 거 재밌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일단 해보기로 한 것.


먼저 시작한 건 스크래블이다. 7개의 철자를 십자 모양으로 연결해 단어를 만들어 나가는 게임인데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단어에 철자를 이어 붙일 수도 있고, 철자를 놓은 칸에 따라 점수가 두 세 배로 뛰기도 해서 한 단어로 최소 2점에서 최대 70점 가까운 점수도 나올 수 있기에 단어를 많이 아는 것 이외에도 전략을 잘 짜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물론 좋은 철자를 뽑는 게 가장 중요하고. 게임에 진 사람이 다음 날 운전하는 게 우리의 룰이기 때문에 어딘가 멀리 가기 전날의 게임은 피 튀기는 접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막상 게임판을 보면 초딩 수준의 단어만 가득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데, 보다 큰 문제는 둘 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하루는 이리저리 열심히 단어를 맞춰보던 남편이 "비그라는 단어가 있나?"라고 묻기에 "몰라, 철자가 뭔데?"하고 되물었는데 알고 보니 B, I , G 였다. 철자에만 집중하다 보니 단어 big을 못 본 것이다. 우리는 한참 웃으며 이 게임의 효과에 대해 살짝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차를 몰아야 하기에 매일 저녁 빼먹지 않고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어쨌든 재미도 있고 은근 승부욕도 자극되는 게임.


§ 요전 번 곱창집을 갈 때 누가 운전할지를 두고 접전을 벌였던 게임. 단어의 수준은 코미디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다큐였다. 그래도 남편은 게임을 하면서 배운 단어가 꽤 돼서 다음 게임인 타부를 할 때 제법 도움을 받았다. 여하튼 매일 저녁 맥주나 와인을 홀짝이며 스크래블을 하는 게 남편과 나의 루틴이 되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게임이 아니라 술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게임은 타부이다. 2명씩 팀을 짜서 한 사람이 설명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맞추면 되는 스피드 퀴즈 같은 게임인데, 대신 카드에 적힌 금지 단어는 사용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animal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zoo를 설명해야 하는 게임. 이 게임은 둘이 하면 재미가 없어서 학교에서 알게 된 일본 친구 두 명을 초대해 같이 했다. 나와 이쿠코라는 친구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가 가능하고, 남편은 한국어와 영어만 가능, 마지막으로 카나에는 일본어와 영어만 가능하다. 공통점은 넷 다 영어를 무지막지하게 못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 더듬더듬 설명하며 게임을 했는데 영어가 엉망진창이라 얼마나 공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재미는 있어서 게임 내내 실컷 웃었다.


§ 타부 게임 카드의 예시. 색깔 있는 칸에 적힌 단어를 아래의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영어도 못 하는데 dress, bouquet 같은 단어를 안 쓰고 bride를 설명하려니 이게 잘 되겠는가. 이 단어는 쉬워서 그냥 "신랑의 반대말" 정도로만 설명해도 되지만, 대부분은 핵심 키워드가 전부 금지어라서 초딩 영어를 구사하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게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럿이 해서 그런지 재미는 있어서 한바탕 웃으며 놀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것. 이미지 출처는 seekpng.com.


나도 우리의 게임이 말도 안 되게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저녁 경건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한다. 누가 즐기는 자가 승자라 했던가. 무조건 이기는 사람이 승자이지. 그러기에 나는 차 안에서 두 발 뻗고 즐길 내일의 안락함을 위해 오늘도 게임판에 손을 뻗어 신의 한 수가 되어 줄 초딩 단어를 만든다. 그러니 우리의 게임을 비웃지 말아 주기를. 나는 지금 궁서체처럼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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