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Feb 06. 2022

벽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의 신산함에 대하여

여기 세 명의 이방인이 있다. 사실 출신으로 보자면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모두 약간씩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백인으로 남편의 직업 때문에 3년 전 조지아주로 이사를 왔다. 명백한 미국의 주류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주의 삶에 적응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지 가끔씩 이곳 사람들의 폐쇄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이웃들을 초대했는데 한 명도 오지 않아 열이 받았다든가, 말로는 만나자고 하면서 막상 부르면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며 가짜로 친한 척을 한다는 둥의 이야기들이다. 내가 그 입장이어도 당연히 화가 났을 것 같다. 그럴 거면 애초에 친한 척이나 하지 말던지. 여하튼 백인들조차 일종의 텃세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랬다.


B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A와의 차이점이라면 흑인이라는 것뿐. 그래서 그런지 인종이나 계층 갈등에 예민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내 눈에는 다 똑같은 미국인이지만 본인들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미묘한 차별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면서 살아왔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녀가 느끼는 박탈감 역시 충분히 공감이 간다. 가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를 부러워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데, 뭐랄까 인종이 같으면 모두 화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잘 통하지 않는 영어로 한국의 지역 갈등이나 빈부 격차를 설명하며 같은 인종 간에도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하는데 쉽지는 않다.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이해시키기란 굉장히 어렵다.


C도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다만 그녀는 아시안이다. 국적도 미국이고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비주류이기에 아시안의 전형적인 스트레오 타입을 벗어날 수 없다. 백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온순한 아시안. 흑인들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차별점을 강조해 얼마간의 지위를 보장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도 없고 인종차별의 공격에서 안전하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온순하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어쩐지 경찰에게 이유도 없이 총 맞아 죽는 일은 드문 것 같다는 정도일까. 여하튼 B가 인종과 결부된 계층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C는 미국과 아시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이방인 축에도 끼지 못하는 그저 스쳐가는 사람이다. 다만 내가 소외감을 덜 느끼는 이유는 A처럼 주류가 아니기에 애초에 이 커뮤니티에 섞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고, 단일 민족 국가에서 살아왔기에 B처럼 내 인종이 곧 계급이 되는 박탈감은 겪지 않을 수 있었고, C와는 달리 나는 어쩌다 보니 잠깐 미국에 살게 되었을 뿐인 명백한 한국인이라 소속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 속하지 않았을 뿐.


한편 캐나다 출신인 영어 선생님은 조지아에 온 지 20년 가까이 되는데, 북부와 달리 이곳은 사람들이 섞이지 못하고 각 출신 국가나 인종별로만 무리 지어 산다는 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곤 한다. 나는 선생님 얘기가 일리 있기도 하고, 기왕 미국에 있으니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노력은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일단 남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들 말을 안 해서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으니 패스. 그 외 학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라틴사람들은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라 어려도 너무 어린 데다, 단기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이어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기에 친해질 기회가 없다. 라틴계는 아니지만 베트남 학생들도 사정이 비슷해 다가갈 수 없고, 천상 남은 건 아시아뿐인데 미중관계가 안 좋아서 그런지 중국인은 없어서 결국 비슷한 또래의 일본인 주재원 아내들하고만 친해지게 되었다.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인종이나 출신 국가 외에도 넘어야 할 벽은 많았던 것이다.


대단한 인싸여서 친구를 몇 백 명씩 거느리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있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를 원한다. 때문에 인종이든 성별이든 나이든 뭔가의 공통점을 찾아 무리 짓거나 혹은 이미 있는 무리 안에 들어가려 하는데, 무리를 둘러싼 벽을 넘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어려운 숙제인 것 같다. A와 같은 주류에게조차 말이다. 한편 무리 안의 사람들 역시 벽을 넘어 오려는 사람들을 차단해야 하는 그들 나름의 고충(?)을 겪을 것을 생각하면, 더불어 산다는 것이 모두에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고 그래서 조금씩 외롭다.  기준을 달리하면 누구라도 반드시 어떤 집단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각자의 외로움을 떠올리며 누군가를 위해 한 뼘 씩만 벽을 낮추어 주면 좋겠다. 벽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해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높이만큼만 쌓으면 얼마나 좋을까. 까치발을 서면 서로가 보이는 한국의 야트막한 옛 담장처럼 아담하고 다정하게.


P.S> 조금전 A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그녀는 별 일 없어도 며칠에 한 번씩은 꼭 잘 지내냐고 안부 문자를 보내준다. 자신의 외로웠던 경험을 떠올려 먼저 벽을 낮춰준 나의 미국에서의 첫 친구 A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그녀가 이글을 읽을 일은 영원히 없겠지만 마음은 전해진다고 믿으며...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