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보 이상 승차. 한국에서는 걷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을 두고 놀리는 표현이지만 모든 것이 멀찍멀찍 떨어진 미국에선 3보 이상이면 차를 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날 픽업을 나오셨던 분이 미국에서 마스크를 잘 쓰지 않는 이유가 모두 차를 가지고 다녀서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길에서 걷는 사람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물론 도심에서야 그렇지 않겠지만 일부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대체로 비슷한 사정이라고 하니 미국 내 자동차 소비량이 연간 2천만 대 가까이 이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자동차는 신발이라는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뭐 재미난 일 없나 눈알을 굴리던 내 눈에 띈 것은 스와니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카 쇼였다. 시청은 걸어서 10분 정도면 가는 곳이다. 나는 한국인이기에 10분 정도는 가볍게 걸어주리라는 마음으로 산책 겸 구경에 나섰다. 사실 별다른 계획이 없는 휴일이라 어슬렁거리며 찾아가 보긴 했으나 대단한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기껏해야 오래된 차 열몇 대 세워 놓고 전시 중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늘어선 차들 앞으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다. 스와니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건 마트를 제외하곤 처음인 것 같다.
§ 도시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스와니 시청 앞 광장. 할로윈 행사도, 어제 자다가 놓쳐버린 와인 페스티벌도 이곳에서 열렸다. 매혹적인 빨간 클래식 자동차들. 사실 빨간색이 좋아서 찍었다기보다 사람들을 피해 찍으려다 보니 우연히 한산한 곳을 찍게 된 것. 예쁜 차가 정말 많았는데 사람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아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왜 각종 행사 때 언론사 관계자들만 먼저 따로 부르는지 알겠다.
클래식 카 쇼에 출품하려면 참가비를 내야 하는데 모두 자기 돈까지 내가며 일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차를 몰고 나와 자신의 소중한 컬렉션을 뽐내고 있었다. 얼마나 관리들을 잘했는지 하나 같이 반질반질 광택을 뿜고 있었는데, 클래식 카 들이라 외장뿐 아니라 내부도 멋들어졌다. 각종 전자기기로 무장한 요즘 차들만 보다가 동그란 버튼들이 자리한 심플한 계기판들을 보니 어찌나 우아하던지 차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자태였다. 열린 보닛을 통해 보이는 엔진룸도 반짝반짝 빛이 나서 어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조촐한 스와니의 클래식 카 쇼가 이 정도라면 세계 최대의 클래식 카 쇼인 <몬터레이 카 위크>는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 1972년 셰보레를 보고 감탄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금 더 들어가니 1923년 포드가 있었다. 낼모레면 100살이니 사람이라면 신선이 될 것 같은 나이인데도 이 차는 여전히 정정한 노인처럼 말끔하다. 차주가 어린 관객들은 운전석에 앉혀 주기도 했는데 쓸데없이 많기만 한 내 나이가 원망스러워지더라.
슈 홀릭이었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에게 구두가 신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처럼, 미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신발인 자동차가 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마찬가지로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을 탐닉했던 것처럼 이들이 클래식 카와 사랑에 빠진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름다운 것 앞에서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이니까. 그런데 최근 젊은 세대들은 차를 소유하기보다 우버 등을 통해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공유경제의 활성화가 자동차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세상의 변화야 막을 길이 없다마는, 누군가는 여전히 클래식 카에 집착하고 빠져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사라지기에 그들은 너무 아름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