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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30. 2024


언어가 그 사람을 말한다. 는

말을 실감다.


하나는 나를 통해 고, 나머지 하 타인을 통해 알게 된다.

말이 전부는 아니,라는  틀린 말 아닌 것도 안다. 연유 중 하나는 본마음과 다르게 쌀쌀맞게 말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겠고. 다른 하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테다. 나도 소싯적, 말이 전부는 아니라 사람이었다. 보다, '말은 말뿐'이라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게 내가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기본 목소리와 어투가 무뚝뚝한데, 렇다고 평소에 친절한 어투를 노력하지 않았고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진심을 알사람은 알 테지' 하는 객기가 있었다. 한편 어떤 이에게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동안 말로만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말을 잘한다고 그 사람을 다 좋게 보지도, 말을 밉게 한다고 그 사람을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 반면 지금은 오히려 말로 그 사람을 '판단'하진 않아도, 말로 그 사람을 보게 되고, 나 역시도 그 시선의 바깥에 두지 않는다. 내 말에 무게를 담는다.

한편 내가 '말'에 대해서 큰 뜻을 품었던 거라면 나가 있.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 싶었다. 그보다는 '화를 잘 내는 사람', 나아가, '화를 곱게 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주로, 말을 잘못 뱉어서 보다는 하지 않아서 생기는 내적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뚝뚝하다거나, 시니컬하다거나, '네가 그렇게 상냥한 말투는 아니잖아?'라든가, '해연씨좀 말투 친절한 필요는 할 것 같아' 하는 류의 말을 자꾸 듣다 보니 귀찮아져서, 내가 하는 말에 친절녹이는 노력을 하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관한 관점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말에 대한 나의 소망은 아무래도 나에 집중하고자 했다. 내가 말을 이쁘게 해서 상대에게 얼마나 좋게 보일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전무했고, 다만 내 어투로 상대가 기분이 나빴다면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없으니 그것 정도는 조심하는 정도다. 반대로 내가 부당한 상황에서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하고 싶다는 소망과 목표가 생기기 시작한  나에겐 큰 부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꾸준히 싫은 말을 잘하는 인간이 되 싶었다. 마른땅에 여전히 순무 새싹 수준인 게 아쉬울 뿐이다.


반면 나는 남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겐 많은 말침묵이나 함구를 택했다. 남편 외라고 했지만 남편도 완전히 예외는 아니었다. 이어서 (어렸을 때 자주 남발했던) 빈말조차 최대한 줄였다. 36년 동안 나는 남과 크게 싸워본 적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 경험 중 상대에게 서운 한 점을 털어놓는다고 좋은 결과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관계는 더 차가워졌고, 그건 너와 나를 가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싸우기를 피하거나 포기하고, 나의 일방적인 선긋기로 모든 관계를 종결다. 말을 잘하거나, 화를 멋들어지게 내는 대신 침묵이나 함구를 택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불만을 감안하고도 유지를 해나가야 할 인연이라면, 상한 기분이나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상대의 것을 무시하거나 안고 다. 그마저도 삼십 대 중반이 되자 상대의 언행이 내가 속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틀린 수준이라면 조용히 연을 끊었다. 나조차 온전하게 인격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서, 이렇게 고백의 처사가 한없이 교만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안다. 내가 이랬던 것처럼 지나간 인연 중 나로 인해 이런 결정을 했던 사람들이 많음도 인정한다. 그러다 신앙은 자주 나를 주춤하게 했다. 신이 아닌 내가 누굴 판단하냐며 주변사람들을 좋게만 포용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고 '잠시' 했었다.


지금 나는 차갑게 돌아왔다. 올해 들어 더욱 매몰차게, 함부로 언행 하는 사람들을 걷어다.


'말 그 사람의 전부다.' 나이가 최소 30이 넘었다면 그렇다.  나쁜 말이나 거친 어투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그런 점을 제어하지 못하는 점 또한 그 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쁜 말은 흐르는 물도 굳히고, 예쁜 말은 나도 모르는 굳음조차 녹여버린다. 주로 상대에서 그것을 많이 느꼈고, 나도 예외가 아니므로, 나도 예쁘게 말하는 사람됨의 의무를 느낀다.


예쁜말은 나를 움직인다. 나아가 그 예쁜말을 해주는 사람은 좋고, 고마우며, 아름답다. 확실히 힘은 예쁜말에서 느껴진다. 나쁜 것을 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바른 태도와 언어가 장착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



계속 는, 말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 잠잠해지고 '어떤 침묵'짙어졌다. 그리고 화를 시원하게 잘 내는 것도 타고나는 '재주'임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은 타고나길 ''하는데, 나는 10을 노력해도 1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야임을 알았다. 그걸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나는 할 줄 아는데 내가 계속 회피해서 화를 못 내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냥 못하는 게 컸던 것이다. 러면서 애씀을 조금 접는 대신, 말 자체를 줄였다.


그리고 나쁜 말을 하는 하는 사람에게 나까지 나쁜 말을 잘하고 싶지도, 좋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알고 보면 참 무서운 태도인 것 같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라는데, 미움조차 걷어내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겠다는 태도니까 말이다.


이제 그냥 나는, 조용하고 괜찮은데 조금 멋도 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먼저 다정한 사람이 되고, 먼저 다정한 언어를 건네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멋지고, 대단하며, 존경하는 아름다움이다. 대전제는 '사심 없이'고. 나는 확실히 다정한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어떤 것은 받아들이거나 어떤 것은 털어내며, 끝내 다정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길은 좋을 것 같다. 내가 말이 전부라고 했으니, 나는 개중에 다정한 인간으로 살아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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