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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Dec 08. 2021

나는 '원래부터' 착하지 않았다.

나의 정서적 독립기_엄마로부터 02.

나는 엄마의 희생이 고맙지 않다

 문장을 쓰기 전에, '모질지만, 누군가는 배가 불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등의 미사여구를 썼다 지워버렸다.

죄책감 타이틀은 조금일지라도

버리기로 했다.


엄마로서의 희생은 이미 충분히 받았다.

감사할만큼은 충분히 감사하지만,

이제는 제발 안 받고 안 주고 싶다.

나는 감히 엄마의 희생이 달갑지 않고, 고맙지도 않으며, 부담스럽고, 고, 멈춰줬음 하는

 정도의 딸이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온 건지.


내가 지금의 버겁고도 어려운 감정을 부디 무사히 극복해내길 바.

그 길에서 간절한 바람이 다.

늘 함께할 나의 육아. 육아의 길에서 내 자식에게 그 어떤 부작용도, 영향도 미치지 않길.

나의 부모가, 나의 가족이 감정적으로 자식에게 버거운 십자가가 되는 일은, 제발 나에서 끝나 주길.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엄마인 나를 떠올렸을 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이미지보다

그냥 좋다는 마음이 드는 엄마이고 싶다.




새로운 가족과 함께하는 육아의 길에서 

나의 원가족이 방해되는 것을 더 이상 견디기가 여전히 버겁다.

꽤 강해질만큼 강해지고, 견딜 만큼 견뎌서 나름 견고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닌 것 같다.

한 연예인이 심리상담에 가까운 예능에 나와서, 못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그땐 클릭하지 않았던 동영상의 썸네일과 그 타이틀이 생각났다.

잘 있던 내가 최근에 얼토당토않게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한차례 더 된 이후로 나는 그 쓰레기통의 구겨져버린 코 묻은 휴지 널더리가 되어서 그 영상을 찾고, 파도를 타서 K-장녀에  관한 영상까지도 보게 되었다.



다행히 영상의 내용을 통해 조금은 마음이 정리가 되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영상에 달린 댓글 들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공감을 하고 있고, 같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의 댓글과 생각들을 읽었다.

놀랍고, 슬펐다.


나의 엄마, 아빠, 나, 동생으로 이루어진 원가족 안에서 나는 동네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이미 동네 북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엄마의 욕받이 도구가 될 것인가.

엄마의 행동, 아빠의 행동에 대해서 아마도 딱 한 번쯤 쓴소리(이지만 사실)를 내뱉었다가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후에 나의 팩폭으로 상처 받았다는 엄마 아빠의 행동으로 또 나게되는 생채기마저 늘 내 몫이었다.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아는 것은 사회생활에서나 부딪히는 여우 같은 상사나 동료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우리 가족에서 가마니로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가마니를 자처하고 있다.

할 말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돌아오는 것은 다시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부모의 싸늘한 시선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나는 침묵할.

말을 못 하고 선이 생기니 툭 건들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어둠 없는 표정, 진지보다는 그냥 가볍게 그냥 그런 고민들이나 하며 삶을 일구며 살아가고 싶은데

즐거움만 가득한 일상이 가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쓸데없는 어둠이 느껴진다.


부모로 인한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는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는 애매~하게 착해서 이런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하는 거라고. 착하려면 아예 착하던가, 나쁘려면 아예 뒤끝도 없이 나쁘던가.

그러지 못해서 이런 고민 따위를 하며 사는 거라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착한 딸이 아니고, 그 전에도 착하지 않았고,

'원래부터' 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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