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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Oct 27. 2022

기도에 관하여

Fake Essay

선생님,  


저는 제 기도가 정말 하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그 게 너무 싫어서 기도한 적도 별로 없어요.

기도 자체가 어색하기도 했고요. 프로라도 신앙의 희망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비극들 앞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했어요. 거의 무신론자나 다름없었던 것도 같아요. 그나마 가끔 하는 기도는 비겁하고 비루했어요. 저나 누군가 너무 아플 때나 되어서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 같은 거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기도까지 하찮게 여긴 건 아니에요.  

본인과 가족, 다른 사람을 위해, 심지어 저를 위해 기도를 해준다는 사람들의 모습은 소중하고 감사했어요. 그렇지만, 그 모습이 소중하고 감사하면서도 정작 나는 같은 길을 걸으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일종에 제가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그런데요,

오늘 그 친구를 만나고 나니 흔들리고 힘든 와중에도 끊임없이 기도하셨던 선생님과, 역시나 기도하는 삶을 가까이하던 친한 언니가 생각났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신이나 교회를    멀리하기보다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니 아무렇지도 않을 때조차 삶에서 꾸준히 계속 기도하고 심지어 저에게 다른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자던 친구들이 생각났어요. 제가 뭐라고, 자꾸 저를 생각하며 기도를 올린다던 사람들도 생각났어요.  


 저는 이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상하게 걱정이 되고 불안했어요. 이 친구는 신앙과 관계가 없는 친구였지만, 해맑고 밝은 기운의 사람이었어요. 저는 힘든 이야기는 인상을 쓰면서 했지만, 이 친구는 그런 이야기도 웃으며 했어요. 그런데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며 하는 말이, 삶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우울하다는 건 아니었어요. 그건 제가 봐도 그랬고요.  우울하지는 않았고, 우울감이 있다 쳐도 약을 먹을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느껴지는 기운과 목소리는 저보다 훨씬 밝고 좋았을 정도예요. 저의 아주 얕은 경험을 토대로 조금 상상을 해보면, 우울감이 극도로 나를 잠식하면, 오히려 삶을 놓을 힘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현실이 누가 봐도 힘들다고 여겨지는 상황인데, 기본적인 생각이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거라면, 그냥 평소의 힘으로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허무하게 만드는 게 쉬울 수도 있겠다는, 무서움에 가까운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제가 잔뜩 아니,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그게 왠지 어색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와중에 기도하던 그 언니가 생각났어요. 그 언니는 제가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지만 저에게 따뜻하게 한 발짝 더 다가와 주던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그 언니도 나도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음에도요. 그리고 이번 여름 힘겨운 시간을 지내셨던, 그중에도 계속 기도했다고 하셨던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제눈에는 멋져만 보이는 선생님도, 그 언니도 삶의 고난 속에서는 인간답게 흔들리기도 하고 마음에는 온갖 분노 혹은 괴로움이 이글거릴 때가 있다는 걸 봤어요. 그 시기 중에, 혹은 그 시기가 잦아들고 어느 순간이 되면 기도했고, 신을 가까이 두셨잖아요.  


기도로 고난을 이겨냈다는 게 포인트가 아니라요. 저는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언니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같이 마음은 아팠지만, 한 번도 불안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이기에 흔들릴 수는 있었지만, 아주 깊이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뿌리내린 희망을 보았고, 그걸 믿고 느낀 것 같아요. 거기서 신의 숨결을 느낀 것도 같아요. 저는 신이라는 이름을 희망이고, 믿음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 언니도, 선생님도 비록 고난이 있을지언정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넘어져서 피 흘려 아파 비록 잠시 주저앉아 있는 한이 있더라고 언젠간 꼭 일어날 사람이라는 것에 믿어 의심치가 않았던 거예요. 반면에 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처음에는 저도 그 언니처럼, 아직 낯설 저를 따뜻하게 먼저 안아주던 선생님처럼 다가가고 잘해주고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고 싶었어요. 저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친구 당연히 잘 해낼 거예요. 그래도 더 지금 당장도 이 친구의 미래가 정말 기대되고, 정말 열심히 살고 싶고, 네가 자랑스럽고, 멋지다는 걸 마구마구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만난 지 얼마 안돼서, 이런 말 하는 제가 아직은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진단 걸 핑계로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어설프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앞으로도 더 가까이 지내자며, 다음을 기약하고 그때의 만남을 마무리 지었어요.  


 

제 얘기를 듣다가 선생님이 그러셨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싫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제가 처음 보는 마치 유레카라는 표정을 지으셨어요. 그러면서,


"해연 씨 그거예요. 그게 광야예요.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일 때 하는 기도가 진짜 기도예요."  

그러면서 자신도 그러셨다고, 자기도 기도가 어색하고, 내 기도가 정말 하찮게 여겨졌다고 그러셨어요. 그때에 선생님은, 비록 제가 우주에 먼지 같은 존재지만, 그 먼지 같은 기도라도 들어달라며 기도하셨다고 그랬어요. 버려지는 기도는 없다고 하셨죠. 분명히 다 올라간다고요. 그래서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라고 가까이 있는 성직자처럼 말씀하셨어요.


저는 기도를 할 때 한 번도 간절하지 않은 적은 없지만, 내가 바랐던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좌절됐는지 확인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기도가 어설펐던 걸까요. 이름 모를 분들에게 기도는 했지만 신에 대한 기대는 솔직히 없었던 걸까요. 그치만요. 선생님. 이제는 글을 꾸준히 써보겠다는 그 마음처럼, 기도도 꾸준히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그 기도의 끝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히 좋은 기운의 존재가 있다고 믿고 하고 싶어요. 여전히 제 기도는 하찮고, 어색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진짜로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고요. 기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 희망이 아주 조금씩 퍼지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기도하다 보면 저에게서도 그 친구나, 혹은 제 삶의 어려운 곳에도 분명 더 의연하고 이왕이면 겸허함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이 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어색함이 문제가 아니겠지요? 티끌 같은 목소리의 기도라도,

괜찮다면 해볼게요.


평화를 빌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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