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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an 10. 2023

자기 연민은 필요 없다

책 읽고 써보는 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연민을 참지 못한다. 특히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에게 냉정하다.

 이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분명 시원한 느낌이었고, 이거다 싶었기에 머물렀겠지만, 역시 나도 냉정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냉정이 청량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도 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 또한 나 말고 어떤 사람들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부연설명은 이랬다.

(책은 Anna Katharina Schaffner 'The Art of Self-Improvement' )


그들의 철학엔 희생자 의식이나 심리적 손상이란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모나 어린 시절의 상처 - 현대의 자조론에서 너무나 자주 다루는 주제 - 에 관해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끔찍한 부모를 두어 불행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보자. 우리는 '어떤 특정 순간에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서로 정을 통하게 해서 나를 갖도록 해야지' 이런 식으로 부모를 미리 선택할 수 없다. 부모가 먼저 세상에 나오셨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우리대로 태어났다. 부모들이 태어날 때도 그들대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불행해야 하는 이유인가? "


 곧 필자는 이 부분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맹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기에 무게중심을 더 두고 싶었다.

요즘에는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많이 있어서, 나를 알아가고, 치유할 게 있으면 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챙기라는 이야기를 방송, 책, SNS를 막론하고 쉽게 접한다. 그 과정에서 나를 돌볼 수 있는 문구도, 정보도, 방법도, 병원치료와 상담센터 등의 인적자원이 많이 드러난다. 가볍게는 힐링이라고 표현하는 것들.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학업이나 신앙활동 등에서 나도 몰랐던 내면의식, 혹은 상처에 대해서 마주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적잖이 누렸다. 덕분에 나는 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인정하며, 부모가 나한테 보였던 과오는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훨씬 나은 모습의 어른으로 살 거.라고 마음에 새겨놓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부모의 과오는 끝난 게 아니어서 수시로 내 삶을 흔든다. 그때마다 내 안의 뿌리와 보이는 줄기를 단단히 하려 또, 노력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꾸준히 나는 '부모를 원망하고 있구나.'였다.


괜찮다고 여기고,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순간 나는 부모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끊고, 부모의 삶과 언행과 나를 개별로 여기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하는 길이 간절했다.


 한편 스토아철학의 저 부분이 눈에 갔던 또 다른 이유는 이거였다. 이번엔 내가 아닌 남의 이유였다. 자주 누군가들이, 옛날에 나는 이런 삶을 살았어. 이런 상처가 있어. 그래서 지금 이래.라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심리치료를 받았던 안 받았던지 상관이 없었다. 아니, 받은 사람의 경우는 더 괘씸했다. 그렇게나 정신적인 치료와 심리적인 치유과정을 거쳤는데, 왜 아직도 그런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삶이 불행했던 사람들이 부모가 돼서 간혹 아동학대나 방임, 잘못된 양육을 하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나는 그렇게 배우지 못해서라고 하는 꼴이 보기가 싫었다. 더 나아가서는 그게 법정까지 서는 끔찍한 범죄자들이 법정 앞에서 변호사를 데려다 한다는 말이 정신병력이 있어서, 알코올 섭취를 했으므로 정신적으로 심약한 상태임을 참작해 달라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씨부리는 모습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졌다.


이미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악'을 행해놓고, 그런 악을 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지 하는 거다.

악한 행동, 잘못된 행동에는 변명도 적절한 이유도 필요 없다. 그냥 나는 맹점이 있어도, 어느 부분들에서는 절대적이고 냉정한 잣대로 사는 게. 좋아는 보였다. 정답은 아닐 수도, 맹점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일단 올해는 그 잣대를 나한테도 부여하려고 한다. 나는 많은 면에서 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운명이 그에게 던지는 모든 것을 "축복으로, 선물로, 누구든 부러워하는 고귀한 무엇으로 바꿀 것이다."라고 말했던 에픽테토스의 말을 실현시켜볼 희망이 단단해졌다.


일상에 불안도가 높은 나는 불안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태연해지는 내가 될 것이다.

잠이 좋고, 게으른 나는 깨어있는 순간만큼은 좀 더 기쁘게 부지런해질 것이다.

많은 날 부모가 원망스럽지만, 그것을 발판으로 내가 더 좋은 성인이고, 엄마가 될 것이다.

부당한 순간에, 말 한마디 못하는 이번 생에 잘 싸우는 말빨은 끝난 것 같은 쫄보지만, 앞으로 상대가 누구든 입 뻥끗은 해볼거다.   

그래서, 중년이 되어서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는 이렇게 자라서 이런 아쉬웠어 가 아닌,  태생이 쫄보고 게으르고, 중간에 불안까지 말썽이었던 배짱이고 부모도 많이 원망했지만, 그걸 발판 삼아 더 노력했고, 그런대로 괜찮게 살았어.라고 말하는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사소하지만 쉽지 않았고 꾸준했던 노력들이 누군가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새해가 됐다고 어제의 내가 다른 내가 되겠나 싶은 오늘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내가 건강하고, 우리가 무탈한 것에 감사하며, 라떼가 아닌 연유가 들어간 프리미엄 커피라고 600원 더 비싼 딜라이트라떼를 주문해 마시며 큰 행복이고 적절한 사치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오랜만에 내 시간을 맞이했다. 그래서 새해에는 더 나아지는 나의 모습을 소망하며 글을 썼다.

2023년 모두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많은 날 무탈하시고, 이왕이면 많은 날 평화롭고 따뜻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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