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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pr 15. 2023

어땠을까

우리도 그런 가족이었다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운이 좋아야 된다고 어떤 의사가 그랬다던데, 나의 엄마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우리도 운이 좋은 걸까. 딸인 나는 엄마아빠가 젊고 늙을 것도 없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엄마 아빠라서, 여전히 아줌마 아저씨 아닌가 싶지만, 그 아줌마 아저씨는 우리가 되었고, 그들은 다른 호칭을 갖게 되었다. 육십 하고도 넷과 아홉, 나이로도 외관상으로도 노년인 게 분명하다. 그리고 육성으로 그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손자가 생겼으니 진정 조부모가 된 셈이다. 그리하여  아들에게 나의 엄마는 왕코할머니라는 별칭이, 나의 아빠는 개구리할아버지라는 별칭이 생겼다. 시부모님이 나란히 음메할머니 할아버지인 것에 비하면 딱 봐도 다른 전개다.


 나에겐 세상에 다양한 가족형태가 있고 그중에 한 명이 엄마(나) 임을 아이에게 설명해야 하는 싫은 의무가 있다. 다양한 가족 형태라고 하지만, 이혼가정의 자녀이고 일종의 피해자인 나는, 요즘엔 이혼이 흔해서 흠도 아니라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냥 이건 '비정상'이고, 그 비정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낫다고 하고 싶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언젠가는 설명해야 할 저 의무가 무겁고도 거친 십자가가 되어 어깨를 짓누다. 십 년도 훨씬 전인 스무 살 무렵 부모가 이혼을 했지만,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고 있다는 심연 깊숙이의 허황을 알고 있다. 그런 비정상의  나는 잦은 순간에 기준치를 넘는 불안, 죄의식, 회피 같은 하등 불필요한 감정에 시달린다. 미세하게 개선되고는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소모적인 감정들과 맞서면서 가끔 이런 상상이 들고는 한다.


 만약 내가 정상범위의 그렇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가끔 투닥거리기는 하지만 용인될 정도의 티격댐이 있는 그런대로 단란한 부모에게서 자랐다면. 엄마 아빠 본인들 가정이 유별났어도, 그들끼리는 합을 맞추어 좋지는 않아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의 모습으로 있어 주었다면 나는 지금쯤 더 쉽게 세상을 만끽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단 그런 상상.


나는 내 선택이 아닌 부모 측에서 오는 불행과 짊어지고 이겨내야 할 필요 이상의 오감과 사건의 무게를 이고 가야 한다는 것에서, 더 성숙해질 수 있다던가, 지혜로워질 수 있다든 등의 위로를 한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감사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겨운 원가족과 물리적으로 독립한 나남편, 아들로 일궈진 가족은 꽤 평범한 행태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엄마와 아빠의 극명히 다른 모습을 보며 이 둘은 내 모와 부이지만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도저히 부부로서는 공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은데 빈번히 깨닫곤 한다.  


 정서, 물리, 경제적 모든 곳에서 자식들에게 완전히 헌신적인 엄마, 헌신보다는 방임에 가깝지만 그 안에서도 야트막한 신뢰가 느껴지는 아빠의 독립적인 모습.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집안적으로 기가 센 사람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그들의 예민함과 성실함, 센 기운 그 어느 것도 닮지 않아  무디고 게으르며 순한 별종이었다. 그래서 유년시절 내내 싫은소리 쉬이 낼 줄 모르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며 살았다. 요즘에 와서야 느낀 거지만 30년 이상을 그들과 지내왔지만, 현실보다는 이상을 지향하고 감정이나 현실회피 경향 탓에, 정작 그들을 안 지 10년도 안된 남편보다도 내가 내 부모를 참 모르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주로 말을 많이 하는 엄마와, 반대로 말이 적만 장난기 있는 아빠 사이에 있으면서 20대 중반까지도 내게 아빠(엄마의 외에 의해) 나쁜 사람이 되곤 했다. 지금라고 그런거 사라진게 아니어, (아니 이젠 대놓고 쌍방에서 욕하는 정도가 됐기에)둘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나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순간이 버겁다. 그런 나는 대형마트 오픈식에서 마구 흔들어 재끼는 바람풍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려가며도 구태여 흔들릴 바람이 나오는 구멍을 부여잡고 살아간다.  


 어린 나는 엄마 아빠가 싸웠든 말든 간에, 눈치가 없어서 아빠가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좋다고 소리 지르며 "아빠다!!" 하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 뒤에는 조용하지만 서운함으로 날이 선 엄마의 시선이 있었다. 엄마랑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지만, 웬일인지 엄마랑 대화다운 고민나눔은 어려웠다. 반면 '원래 세상이 다 그래.'라는 뻔한 답변이 많았지만, 시시콜콜한 사연을 말하기 쉬운 대상 늘 아빠였다. 아빠는 아빠로서 나쁜 점수 아니었다. 남편으로서는 낮은 점수였을지 몰라도. 예를 들어 아빠의 아빠점수가 70점이라 치면, 그 점수는 엄마에 의해 통으로 자주 40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엄마의 자식들에 대한 희생과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감사한 것이고, 그래야 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그 희생과 사랑은 자주 강압과, 말도 안 되는 의로 이어졌음을 알게 됐다.  좋은 엄마와 나쁜 아빠, 나쁜 엄마와 좋은 아빠 도통 안정될 날이 보이지 않는 부모의 모습에서 흔들리고 여전히 혼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거다. 


 며칠 전 아빠가 내가 있는 청주로 와서 시부모님께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빠와 같이 사는 아줌마와 함께. 실은 내가 결혼하고 1년쯤 됐을 때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두 분이 시부모님 식사하겠다는 청을 거절한 뒤로 나는 친하지도 않은 그 분께 미운털이 박혀있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에게 애써 오겠다는 그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번엔 부딪쳐 보기로 했고, 알겠노라고 했다.  


 토요일 오후 11시 반 분위기와 맛 좋기로 유명한 고깃집으로 예약을 한 뒤 일주일은 꼬박 밤부터 아침까지 악몽에 시달렸다. 멀리 사는 아빠랑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와 있는데, 가까이 사는 엄마한테 전화오는 꿈, 절대 마주해서는 안 될 그 둘 아니 셋이 우리 집에서 마주칠 뻔해서 내가 발을 종종 거리며 당황하는 꿈. 꿈을 꾸고 나서도 걱정이 멈출줄을 몰라서, 일부러 엄마에게 그날은 우리 집에 운동 삼아라도 오지 말 것을 당부해야 하나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꿈속에서 깨고도 한참을 헤아렸다. 아빠와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오는 것도, 우연히 주말에 엄마가 우리 집에 오는 것에도 내 잘못은 없는데 상황이 첨예한 갈등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그 모든 가능성과 상상 속에서 서른다섯 먹은 성인 딸은 초조해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다.


 제발 소소하거나 끔찍한, 어떠한 변수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당일이 다. 준비는 했으나 몸이 좋지 않다고 아주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좋은 사유는 아니었지만 속으로 조금 다행이었다. 식당에 가기 전 아빠와 동생이 먼저 우리 집에 왔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보는 아빠가 눈에 띄게 나이 들어있으면 어떡하지, 머리가 더 빠져 있으면 어떡하지 같은 못난 걱정을 했는데 아빠는 좋아 보여서 또 한 번 다행이었다. 식당으로 가기 전 그들과 약 한 시간 정도의 담소를 나눴다. 요 근래 아빠에 대한 생각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음에도 좋은 게 좋다고 곧잘 털어는 나는 금세 아빠와 편안한 대화를 이어갔다.


 아빠가 곧 칠순이는 얘기를 내가 먼저 꺼냈는데 그 '지금'을 대하는 아빠의 인생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배가 나오지 않게 꾸준히 수영을 하고, 초중고별로 동창들 '단톡방'이 있댔다. 이미 간 사람도 있고, 있는 애들도 많고, 아팠다 나은 애들도 있다. 시간이 되면 보는데 할아버지가 돼서 만나는 친구들임에도 옛날 모습들이 있고 소소하니 재밌다는 것이다. 그 동창들과 얼마 전 모임에서 지금 모임을 딱 10년 유지해 보자고 했다는데 거기서 어떤 생사나 늙고 젊음에 대한 간절함, 애절함, 구질구질함이 없었다. 그냥 그랬다고 말하는 데 그 자연스러움 허심탄회,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는 마음과 여유가 좋았다.

 오랜만이고 잠깐 얘기했는데 아빠랑 친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런 상상을 이어갔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았다면 아빠와 나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살갑고  가까웠을까 하는.

 가능성 없는 상상은  늘  잠깐. 여전히 나는 아빠 불편했으므로 시부모님과 만났을 때 우리 가족이나 내가 폐가 되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현실을 이어갔다.


 상견례보다는 덜 어색하게, 아주 친한 사람들끼리의 식사보다는 불편하게, 입꼬리는 한껏 위로 힘을 주며 보기에는 좋은 식사시간을 가졌다. 우리 테이블비스 담당직원분이 담소에 어색함을 깨주기도 했는데, 아빠가 거기에 구태여 농담을 더하며 웃는 모습이 불편했다. 고급식당에 가면 늘 그랬듯 아빠는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나한테 찔러 주었다. 이따가 담당직원 팁을 챙겨주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그 모습이 처세나 오바같다고 할까? 점잖지 못한 느낌이랄까. 해서, 

"아 됐어." 하고 말았는데, 이번엔 그냥 시부모님은 먼저 나가시고, 아빠 뒤에 있는 시점에서 직원분에게 사하며 아빠가 준 돈을 드렸다. 내키진 않았는데 아빠 보기 좋으라고.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우리가 대접을 했지만, 헤어진 우리 가족 일부만 함께해도 어떤 쓴소리 없이 함께해 주시는 시부모님께 이상하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감사의 인사만을 남긴 채 아빠는 우리 집으로 와서 마저 대화라는 걸 해봤. 이제 나는 얼굴 볼일이 거의 없는 고모들, 그의 딸들, 잊고 있었던 친척오빠의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전에 아빠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는 주로 아빠와 남편의 대화가 60% 였고, 내가 40% 정도 의미 없는 추임새를 넣다 뺐다 했는데 오늘은 아빠와 내가 중심이 됐고, 남편과 동생이 아이를 놀아주며 귀만 열어놓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아빠랑 친해지는 느낌이다. 여전히 나는 이 아빠가 불편하지만 불편해도, 그래도 내게는 근본적으로 더 편할 수 있는 가족이란 아빠가 있긴 있었구나 하는 느낌.  


 그러다 문득, '그랬' 싶으면서, 어렸을 때 종종 아빠와 이렇게 대화했던 순간들이 몇 개 스쳐갔다. 불편해야 할 것 같은 아빠가 살짝 편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가족인 아빠가 내게 온전히 편하지 못하게 된 데는 그 아빠와 엄마의 이혼에서 연유하는 여러 가지 들이 있겠지만,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적당한 부부, 가족의 형태로 있었다면 지금의 불, 편에서 불은 빠지고 조금은 막 나갈지언정 밉지 않게 애교스럽고 다정한 자식이고 사람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상상이 스쳤다. 우리 집 개구리할아버지는 왕코할아버지가 될 수 없고, 왕코할머니는 개구리할머니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이 이젠 익숙하고도 당연한 현실이고 상황이고, 문장인 것을.

나는 오늘이 좋았는데, 좋으니까 비로소 이 현실이 슬퍼지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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