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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y 06. 2023

엄마된 후로의 첫 퇴사기 1


  4월 끝자락, 학생들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의 밤바람이 선선하다. 지난 금요일 나는 파트 강사로 일하던 학원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고야 말았다.


  파트타임 강사로 학원에 돌아와서는 코로나 영향으로 강의 수가 적어진 탓도 있었지만, 학원 시간표가 마침 원장님과 나의 강의 시간이 겹치지 않는 거로 한동안 운영이 돼다가, 꾸준히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부득이하게 결국 한 타임이 원장님과 수업이 겹치게 된 지 한 달째였다. 이게 불안했던 이유는, 혹여나 아이가 입원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아플 때 나 때문에 수업에 결손이 생길까 봐서였다. 이런 우려가 엄마의 위치로서는 당연한 걸 수도 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곤란한 것도 당연한 거니 시간표가 바뀌기 전 원장님께도 말씀을 드리긴 했었다. 혹시 지금 겹치는 시간표로 갔을 때, 아이가 아프게 되면 그 펑크나게 되는 민폐에 대해 우려가 많이 된다고. 이런 민폐부터 생각하는 현실조차도 말씀드리기 죄송하다며. 원장님은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너무 자주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이라도 배려해 주셨지만, 끝내 편할 수는 없었다.


  마침 한동안 아이가 건강하다 싶어서, 그래. 그냥 그런 불안의 가능성만으로 끝나주기를 바랐는데, 아이가 1주일은 장염으로, 그게 나은 지 1주일 만에 유행성 독감으로 총 3주를 긴장상태로 지냈다. 3주 중에 증상이 지독해 링거 신세를 졌던 하루, 고열과 기침이 떠나질 않았던 하루 총 이틀은 결국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됐다. 4월 첫 주, 셋째 주 하루씩을 펑크를 낸 셈이다. 어린이 전문 병원에서 링거 투혼을 하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나의 경우 근무 사정상 대구에 있는 남편은 아이가 첫 입원을 했을 때 빼고는 이제 나서서 쉽게 근무를 빼고 달려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면 나는 양가 부모님에게 비교적 도움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는 (엄마된)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수액을 맞거나 약을 먹었어도 고열과 복통으로 쳐져 있는 아이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가는 게 아이, 조부모 모두의 것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엄마였다. 일을 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이 먼저라니. 이기적인 걸까. 회사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있는 거였고,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지만, 육아와 회사 그 사이의 일에서는 어느 정도 보수적인 나였다.


 아이엄마로서 예상이 되는 시나리오였다. 아이를 갖기 전, 나는 아이가 너무 좋아서(내가 그 아이를 키울만한 좋은 사람이 아직이라는, 그 아이를 내놓기엔 이 세상이 너무 불안전하다는 이유를 크게로)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었다. 반면 당연히 자기 아이는 갖고 싶다는 남편의 그런 평온하리만큼 단순함이 안정감으로 다가왔고, 1년 동안의 적당한 마음가짐 끝에 조심스럽게 아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오기 전에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당분간 가감 없이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딱 파트강사로만 경력 유지는 하겠다고. 그렇지만 내가 경제나 경력이라고 불리는 바깥일로의 경험치를 올리는 데 일순위를 두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학원강사일을 주업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거 말고도 세상에 하고픈 일이 참 많은 나는 아이를 가짐으로써 내려놓게 되는 그런 것들이 많이 아쉽긴 했지만, 아이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느 정도의 포기와 희생이 그리 나쁜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결정이었고, 그런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대로였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이가 첫돌을 넘기고 16개월 즈음부터 주업은 육아와 가사, 일주일에 세 번 2타임씩 바깥일로 강의를 하고 그곳에서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아쉬운 대로 바깥일 커리어를 유지하고, 나머지 일주일에 두 번 쉬는 날에는 쫓기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했다. 천성이 느리고 게으른 나는 모든 순간이 빠듯하게 지나갔지만 그 안에서 만족을 찾아갔다.


"원장님 어쩌죠,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수업을 펑크 내게 될 때마다 나는 분명 통화 중인데도 머리, 손, 허리 숙이거나 조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굽인 것 같다. 그 와중에 원장님이 매번 말이라도 "아이가 먼저죠. 학원 일은 걱정 마시고 아이케어 잘 해주세요"라고 한 건 실제로 감사한 일이었고, 요즘 세상에서는 내가 운이 좋을 정도로 과도하게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유로 일을 그만둔 한 친구네 사장은 아이가 폐렴이 걸려서 결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계속 이러면 곤란해요."라고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치고 도리였지만 과도하게 감사하며, 송구스러워했다. 두 번째 펑크를 마무리하고 다음 수업에 나서던 나는 정작 내가 링거를 맞아야 할 것 같은 컨디션이었지만 독감 따위로 내가 아픈 건 괜찮다고 나가서 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저는 더 이상의 죄송합니다는 못할 것 같아요."

원장님은 아이가 자주 아픈 걸 어떡하냐면서도, 자기도 연속 두 번째 펑크 때는 좀 아찔하긴 했다며 고백했고, 그럼에도 자기는 괜찮으니 방도는 마련해 놓겠으나 내 결정에 따르겠다며 4월 둘째 주까지는 이야기를 해달라 했다. 정말 한 번만 더 고민에 고민을 한끝에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신기한 건, 내 인생에서 일을 그만두는 것이 이렇게 자발적이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는 것. 그전에 이것과 관련해서 글을 적은 적도 있지만 나는 일의 현장에서 버티는 것에 관대함과 참을성이 적었다. 아니고 무리된다, 억울한 게 쌓인다 싶으면 언제든 '그만둘 거야'라는 마음을 안고 살았고, 실제로 그러는 데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그나마 거기서도 조금 아쉽고 미안했던 건 아이들과의 인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이들과의 인연이, 시간이, 하물며 자체가 좋아도 그것 하나만으로 내 앞에 쌓이는 부조리들을 감당하는 것은 그 당시 내키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초짜 시절의 나는 학원에 가면 기존에 그 반을 이미 꾸리고 있었던 아이들이 있었고, 중간에 투입된 선생이었다. 그러고 1년이 지날 즘이면 다시 터줏대감 아이들보다 먼저 나왔다.이번 퇴사에서 돋보이는 다른 점이었다.


  자발적이었지만 자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아프면 왜 매번 엄마인 내가 먼저 일선에서 펑크를 내는 것에 선두가 돼야 하는 것인지. 이런 것을 잘 견뎌야 바깥일에 능력 있는 잘도 나가는 엄마인 여성이 되는 것이거늘, 나는 결국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한 무언가의 부조리에 굴복하고야 만 기분이었지만, 그걸 제하고도 아이들과의 관계를 마무리하는 것에 있어서 아쉽고 미안하고 아깝기까지한 마음이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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