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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y 11. 2023

자유, 그 앞에서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나는 몰랐지만 저명 작가(시인, 철학자)의 책을 읽고 있다. 제목이 '불안의 책'이란  그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도라도레스 거리와 바스케스 사장, 회계관리장인 모레이라로부터, 사무실의 모든 직원과 사환, 배달부 소년과 고양이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상상했다.(중략) 자유는 진정한 안식이자 예술적 성취이며 존재의 지적인 완성이 될 텐데. 그러나 정오쯤 휴식시간에 카페에 들러 이런 상상을 했을 때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나의 꿈을 훔쳐갔다.

 만일 자유로워진다면 후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말할 수 있다. 나는 후회할 거라고. 바스케스 사장과 모레이라 관리장과 출납원 보르즈스, 모든 착실한 직원들, 우체국에 편지를 가져가는 유쾌한 사환과 배달부 소년, 순한 고양이, 이 모든 것이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눈물 없이는 이 모두와 이별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그들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과 헤어진다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되리라.



보이는 대로 그냥 느끼기에는 학식이 깊지 않은 나도 얕게나마 공감이 되어 눈길이 머물렀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언뜻 언뜻 하고 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근래에 나는 고작 하루에 3시간 일주일에 세 번 하는 바깥일을 그만두었는데. 한가해지지 않았다. 하루에 두 시간씩 세 번이란 객관적인 수치의 시간이 늘어났다 해도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늘어난 시간에 비례되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이랬던 것 같고, 심지어 더 바빠진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굉장히 부지런하지 않지만 하고 싶은 건 많아서 조금씩 꾸준히 해보려는 35살짜리 엄마, 가정주부인 나의 제1의 소원은 여전히 (한 사흘간은) 아침 알람 없이 끼니도 거르고 푹신한 침대에서 오후 나절까지 편히 자보는 것이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즘이면,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붐비지 않는 자연광 드는 장소에 가 책을 읽고, 전업 작가처럼 열을 올려서 글을 쓰고 싶다. 는 생각을 잊을만하면 던 중이었다.


 월수금은 외할머니가, 화목은 엄마가 어린이집 하원을 해 주던 아이는 모든 날에 엄마가 자기를 데릴러온다며 좋아했다. 아이에게는 내가 학원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는데, 그것만 그만두었을 뿐 여전히 혼자서 할 수 있는 엄마일들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되면 일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던데, 돈이 제1의 목적이 되는 일을 다시 하게 라도, 육아든 가사든 바깥일이든 일을 두 가지 이상 모두 잘 해내는 것  아직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 영역이다. 특히나 나같이 체력도 , 정서도 파워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은 더욱. 

 나는 엄마가 된 이상 그 삶에서 1순위로 쳐서 살고 있지만, 육아에 쉬운 건 하나도 없을뿐더러 시간이 지나도 벅찬 게 많아지는 이런 불완전한 인간인 나는, 더 확실하게 완전하고 강건하며 담대해져야 하는 엄마의 시기에 오히려 더 나의 불완전성을 낱낱이 마주하고 있다. 잘도 하고 싶고, 잘도 아니면 의연하게만이라도 꾸준히 하고 싶을 뿐인데, 그렇게 벅차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들은 많아지지지만 동시에 못하는 것 또한 많아지자, 온전한 자유라는 것을 지극히 갈망하다 못해 앓고 있는 내 생각회로를 발견하는 순간이 종종 있던 참인 것이다.
 
 한때는 이런 식으로 나를 위로했었다. 만약 내가 결혼은 했거나 안 했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영원히도, 온전한 자유의 더 간절함과 소중함은 알지도 못한 채 죽는 순간까지 투덜거리기만 하며 살았을 거라고. 그 자유의 맛과 지독한 갈증에 가까운 갈망, 소중함을 알기에 지금 주어지는 일말의 자유시간을 더 간절하게 지게 된 거라고.

그 생각이 위로가 되던 때도 있지만 지금은 왠지 헛수고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있으니, 여기서 잘 적응하고 잘 해내가는 것만이 답이고 지혜이니까. 그러면서 우연히라도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도, 내가 벌려놓은 잠깐씩 행복하고 즐겁지만 불편하고 옥죄며 피곤한 일들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그 자유가 순수하게 편안한 자유로움으로 와주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수시로 근거가 있거나 없거나한 이것저것의 불안에 휩싸이고, 그 바탕에는 육아든, 일이든 자기 관리든 모름지기 잘해야 한다는, 아니, 잘은 아니어도 나로 인하여 잘못되는 것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의무감이 있는 듯한데, 이 마음을 적당히는 버리는 것이 쾌적하고도 조금 봐줄 만한 여유가 있는 삶에 가까워질 거라는 것을 안다. 잘하고 있다고 나를 스스로 위로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런 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강건하게 물 흐르듯이. 인생에 주어지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가고 싶다. 잊을만하면 나를 옥죄는 몇 가지의 삶의 멍에를 메고서도 그냥 짐을 진채로 그 속에서 행복한 것들을 더 바라보고 찾고, 빛을 내고, 감사하며, 거기에 지혜와 현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이 모든 것이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는 구절에서는 한국 드라마 '고백부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출산 전에는 별로 땡기지 않아 안 봤는데, 아이를 낳고서는 많은 엄마들이 강추기에 호기심에 봤다가 엄청난 공감과 재미를 얻었던 드라마였다. 결혼을 하고 육아가 시작되면서, 전업 육아, 전업 경제활동에 각자 지칠 대로 지친 아내(장나라 님) 남편(손호준 님)은 서로 불만과 오해만 쌓여가던 중, 우연히 그들이 사귈 무렵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젊음과 패기, 탱탱한 피부가 아니더라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그 자체로 잠시는 기뻐하며 생활을 해나가지만, 곧 둘은 현실에서 그 둘이 눈물콧물빼며 함께한 아이를 떠올리며 뜨겁게 눈물 흘다. 곧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를 택하며 머리를 맞대는 이야기였다. 아마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이났다.


 분명 지금은 나 홀로, 그리고 마냥 행복에 빠져 연애나 하던 그때보다 고단하고 쩔어있는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비로소 지금이 익숙해진 걸 알고, 아이를 떠올리며. 지금 내가 자유를 갈망하는 것과 다르게 지금의 빛남을 알게 되겠지. 마치, 내가 대학교에 갔을 때 수업의 시작과 끝에 담임 선생님이 조종례를 하며 공지사항을 말해주지 않고, 화장실도 수업 중에 허락 맡고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에 놓고, 그 압박 가득하던 수능의 분위기 속에서 때 되면 쳐대던 학종소리와 선생님의 무한 잔소리가 그리웠던 나처럼.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지금의 나에 대입해 보건대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 참 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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