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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n 04. 2023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을 읽으며.


무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후는 우리의 불안 위로 내려앉았고,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불었다.

p.11


  이십 대 후반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 (정신영역) 최대 과제는 불안 극복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불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진로, 경제, 관계, 교육 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병적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정도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하등 쓸데없는 것인지, 어리석은 시간 낭비인지 알면서도 마음대로 쉽게 되지 않는 자신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노력을 하면서, 나아진다기 보다 그냥 부딪히며 무뎌지게 하는 것에 가깝게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을 극복하려함에 에너지를 덜 쏟을 수 있다면, 아니 안 쏟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은 얼마나 쾌청하고 단순할까에 대한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보고야 말았다. 그전에도 불안이 제목에 들어간 책들을 몇 개 접했지만, 그냥 평범한 불안만 갖고 노는 것 같거나 그도 아니면 나와는 노선이 다른 불안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답답해져서 결국 책을 덮곤 했다. 켕기는 과거가 있었지만, 그녀님이 선택한 책이라면, 혹 낚일지라도 괜찮다는 마음을 깔고, 불안 극복의 희망은 쥔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표지부터 불안의 책 그 자체였다. 아이가 이 그림을 무서워해서 이면지로 표지를 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또 낚였다.
내가 겪는 불안은 화자의 것들에 비해보면 꽤 표면적이고 하찮다 생각이 들 만큼 단순한 것이었다. 반면 화자의 불안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표현하는 불안 그 자체보다 더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불안정’에 가까웠다. 이 불안정한 정서를 가졌으며 생각은 어마 무시하게 많은 이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있노라니 또 답답하고 안쓰러운 순간들이 넘쳐났다. 단순 독서모임이 아니라 필사 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꼼꼼히 읽지 않았을뿐더러, 은근히 엄청나게 많았던 눈에 박히는 문장들을 읽고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생각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지만, 그 생각을 보통의 작가들처럼 실제 사연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로 구체적이고 쉽고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표현했다면 더 몰입이되서  짜증이 났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말하면, 많은 문장을 추상에 가깝게 썼기에 이 사람의 진가가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서는 자신을 자꾸만 낮추거나 감정에 무딘 사람처럼 표현하지만, 사환 소년이 떠날 때 슬퍼하는 그의 모습이나, 자연의 모습들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듯한 그의 시선이 실제로는 굉장히 감정이 단순하도록 풍부한 사람일 것임을 짐작했다. 작가가 글 밖에서는 감정을 그대로 단순 솔직하게, 크게 웃고, 울거나, 분노하고, 잔잔함조차도 마음껏 드러내며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모임이 아니었으면, 이 책을 덮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 모임 덕분에 분명 더 부여잡고 읽게 됐음은 확실하다. 그런 책들이 있다. 나 이 책 진짜 싫은데, 이 주인공 답답하고 짠해서 진짜 싫은데, 분명 끝까지 읽어서 잘 되는 꼴을 보고야 말겠어. 이런 책들.


생각보다 열심히 함. 필사는 특유의 몰입의 즐거움이 더했다.

처음엔 낚인 기분 그 자체였다가, 이 사람 뭐지 싶었다가, 조금 재밌고 속 시원도 싶다가, 읽는 내내 우울해졌다가, 우울에도 지쳐 짜증 났다가, 이내 내일은 이 사람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앉았을까. 하는 루틴에 익숙해졌다. 그동안 불안이란 단어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를 우울하고 짜증과 일말의 호기심으로 불안을 덮어주다니.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결국 회피하지 않고 조금씩 마주하되, 그것을 인정하고 놔두고 무뎌질 때까지 버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이 그들을 쓰면서 기분이 어땠을까. 내 생각엔 감정이 많이 해소되지도, 정리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심지어 잠자는 불안과 무기력 권태 허무 비관 등을 더 끄집어필요 이상으로 파고드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쓰는 자기 글들. 그 와중에 애써 위로하거나, 반성하는 기미가 없어 매력이었다. 덕분에 그토록 불안정한 문장 속에서 종종 드러나는 통찰들이 반갑고 소중했다.
 
내가 주로 느낀 매력은, 이 사람이 글 읽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생각 자체, 근거 없는 흐름조차 그냥 그대로 다 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통찰과 조언에서도, 그게 틀렸을지 말지 고려하지 않고 일단 뱉고 보는 것에서 근자감 비슷한 매력과 대리만족을 느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올리는 글을 쓸 때 타자를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쓴 적은 없다. 때론 그마음이 감정을 더 정갈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지만, 가끔은 그냥 욕이고 흐름이고 못남이고 막쓰고 싶단 생각이 든단말이다. 심지어 나 또한 비판적이고 맹목적인 각종 생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쓴 적은 더욱 없다. 온전한 근거를 마련하지도 못하고, 이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것이며, 이미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일 수도 있겠으며, 이런저런 이해관계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이미 피곤하고 귀찮기 때문에 시도조차 안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글에 전혀 타인 의식의 시선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많은 순간 그의 문장에서 반감을 느꼈다는 것이기도 한데, 반감을 느끼다가도 끝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작가가 내 맘에 드는 생각을 해야 해? 나는 꼭 이 사람을 다 이해해야 해? 꼭 바른 말만 해야 하냐고.”
 우중충한 감정의 기류는 죄다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작가 덕분에 나는 이 사람을 끝내 그대로 인정하고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초반에 계속되던, 제발 끝에는 평온한 진리를 깨달아 주세요. 제발 잘 돼주세요. 평안해 주세요. 같은 희망도 포기했다.
 
그 포기하는 마음이 들 무렵, 상상 속에서 책을 다 읽고 모임이 끝나면 이걸 팔아버릴 것 같았다. 희망도 없이 이를 악물고 책을 읽고, 그동안 필사해둔 부분을 다시 읽는데, 책을 소장하기로 했다. 이 문장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뭘까.
 
스며들었다. 맨날 생각 있는 척하면서 담배 피우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철학 얘기는 좋아하고 멋있는 척 조언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도 안 멋있고 답답한데 요상하게 자꾸 얘기는 들어주고 싶고, 기회를 준다면 내 존재로 위로가 돼보고도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작가가 평온하길 바라는 마음을 진즉에 포기했듯이, 당연 불안 극복이란 단어도 포기한지 오래였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연유로 다른 책을 읽었는데, 마찬가지로 낚인 책이 있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남궁인 작가가 쓴 ‘제법 안온한 날들’ 이었다. 고백하자면 내가 주로 겪는 불안의 양상은 거의 건강과 직결된 것인데, 응급실 의사가 쓴 안온한 날들이라니. 나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를 내가 두려워하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갖가지 상황을 마주 해내길 선택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단 존경 박고 가는 사람이다. 그런 의사가 쓴 글이라니. 난 분명 이 의사선생님의 현명하고도 탁월하며 절대적인 담대함을 읽을 것이다. 분명 뻔할지라도, 단순하게 나를 불안에서 일깨워줄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을 거라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놀랐다.
이 의사 작가님은 정말 유약하고도 내가 느꼈던 하찮은 그 흔들림 들을 더 지독하게, 처절한 현장에서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거기서도 불안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뻔한 것조차 없었다. 그냥 너무도 당연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조차 평균 이상의 흔들림과 불안을 많은 순간 그저 마주 해갈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불안이 심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회피를 하지 못해서라는 글을 전문 도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나는 결혼 전까지 완전한 회피형 인간으로, 불안을 주는 요소들을 열에 아홉 번은 적절하고 완벽하게 회피해나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동안 내가 회피할 수 있었던 관계와 상황의 모든 것에서 절대로 회피란 있을 수 없게 됐다. 동시에 잘하고 싶다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겹치면서, 대단하지도 않은 그저 원만한 삶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결국 불안을 표면적으로 마주하고, 문제로 인식했다. 끝내는 병적 증세를 앓는 피크를 찍고 치료했다. 엄마가 된 이후로는 그보다 더 큰 불안을 마주하고 있지만 엄마란 간판이 때로 우황청심환이라도 털어가며 정신줄을 붙들고 살아가게 한다.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페르난두처럼 말해봤다.

얼마 전 역류성식도염이 화근이었지만, 불안함에 중견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돌아 결국 가까운 가정의학과에 갔던 날, 불안해하는 젊은이인 나를보고 의사선생님이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다 그러고 살아요.”
 
‘불안의 책’을 읽으면서 불안의 포인트를 저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과 문장에서 약간의 희망과 해소가 느껴지는 몇 안 되는 순간이 있었다. 자조 섞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본인을 인정하는 때, 복잡한 생각이 자연의 모습 안에서 옅어지는 때. 이다. 안고 가고 싶은 문장이 많았는데, 그중에 약간이라도 해야 한다거나, 조언 톤으로 말하는 부분은 제하고(그래야 한다는 압박이 불안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저 보는 시선에 머무는 문장을 골랐다. 짜지도 달지도 않지만, 애써 식초나 겨자를 치지 않고도 잘 먹을 수 있는 슴슴한 메밀 막국수 맛집을 알아낸 기분이었다.
 
“무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후는 우리의 불안 위로 내려앉았고,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불었다."





그 밖의 문장.


p.31 영혼에 미소를 띠고 도라도레스 거리와 이 사무실, 이 사람들 사이에 한정된 인생을 고요히 받아들인다.


p.77 나는 패배에 대한 나의 자각을 승리의 깃발인 양 들고 간다.


p.78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p.110 무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후는 우리의 불안 위로 내려앉았고,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불었다.


p.133 모든 시대의 열망 때문에 나 홀로 내 안에서 고통스러웠고, 모든 시절의 불안이 나와 함께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p. 308 삶에 아픔이 부족하지 않도록, 반드시 치욕이 주어지도록, 삶에서 감당해야 할 슬픔의 몫을 꼭 치르도록 영혼은 그런 충격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p. 327 우리가 사는 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 위대함과 존재할 수 없는 행복 사이를 흘러가는 오해이며,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누린다.


p.387 우리 중 고결한 정신을 타고난 이들은 아무것도 원하거나 바라지 않고 사회와 국가로부터 물러나서 우리의 존재라는 십자가를 망각의 갈보리 언덕까지 지고 가려 한다.

 

p. 526 자신의 야망과 고뇌와 욕망을 무심히 바라보는 수준까지 끌어올려 창백한 승리를 거둘 것.

 

p.527 그리고 두려움에게는 우리 눈 속의 고뇌로만, 유일하게 미학적인 태도인 영혼의 눈길 속 고뇌로만 나타나라고 타이를 것.

 

p. 560 인생에서 불행했던 모든 순간을,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거나 천박하게 굴었거나 남보다 뒤떨어졌던 순간들을 우리는, 마음의 평정에 의지하여 여행 중의 불편함 정도로 간주해야 한다.

 

p.571 선명하게 구분되고 심지어 움직이고 있어도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모든 것들이 지금 내게는 사탄이 유혹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굽어보던 세상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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