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힘들어." 또는 "내가 더 힘들어."
얼마든지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할 자신 있었고, 할 준비 돼 있었다. 그리고 육아(놀아주기를 제외한, 이를테면 씻기기, 똥닦아주기 같은)나 가사를 두고 대놓고 내 책임이 가장 먼저인 것처럼 구는 사람을 두고,
"나도 내 할 일 많아."
"나도 지. 금. 이거 해야 돼."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돈 번다고 유세 떨지 말라고, 여건만 되면 나도 벌 수 있다고,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돈이 다는 아니라고." 도 말할 수 있었다. 정확히 하면 소리칠 수 있었다.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 가득 붙여서. 더 솔직하게는 **욕도 하나 붙여서.
<평범한 결혼생활>에서 임경선 작가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솔직히 남편이 가사 분담을 이만큼 하게 된 건, 내가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돈을 벌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이 내겐 이렇게 읽혔다.
하지만 솔직히 남편이 가사 분담을 이렇게까지 가져가지 않게 된 건, 내가 결혼 후에도(정확히는 출산 후에도) 끊임없이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 경제력이나 권력차이로 집안 내 가사분담의 차이나, 태도가 달라지는 같잖은 모습들을 우리 집이 아니고서도 본 적이 있다. 반면 경제력과 상관없이, 어느 한쪽의 성에게 권력이 치중돼서(대부분 여성에게) 가사와 육아분담이 잘되는 모습도 많이 봤다. 그러나, 역시 경제력과 관계없이, 양쪽이 민주적으로 가사육아 분담이 잘 되는 모습 또한 많이 봤다. 가장 마지막의 사례가 나의 소망일테다. 소망이라니. 누가보면 대단한 부귀영화나 바라는 줄 알겠다.
주말부부로 살며 남편이 있는 주말이면 좋기도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아니 자주이겠다. 어쩐지 집에만 오면 가사나 육아를 나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는 것처럼 구는 남편의 태도를 보며, 거기에 일일히는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자제하는 나를 보며, 자꾸 '지고 억울하다'는 생각말이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으며, 어쩌다 보니 변해있었다는 구차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도 직장생활을 해봤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바깥일이 웬만큼 쉬운 일을 넘어서 어려운 작업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장이 느끼는 그의 말없는 무게감 또한 알고 있기에 배우자로서, 아이의 아빠로서 감사하고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도 크다.
하지만 그게 그렇다고, 내가 하는 육아와 가사가 더 편하고 하찮은 것은 절대 아니란 말이다. 일단 대부분 '집'이란 일단 아늑해만 보이는 공간에서 행해지는 일들이고 티도 안나거니와, 심지어 못한 것은 두드러져 보이는 일이기에 언뜻 어려워는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여성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나도 심지어 그런 뉘앙스의 시각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건 '육아가 더 힘들다!'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육아와 가사, 기존에 내가 하던 풀타임 일을 두고 택하라면 이제는 무조건 후자다. 아이의 양육만 온전하다는 보장만 있으면 나는 지금이라도 어디서도 일할 준비가 돼있다. 출산 육아를 거치니 엄청나게 강해진 기분이란 말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출산을 하기로 결심한다면 커리어는 이차로 두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에 최우선을 두기로 한 사람이니까 양육과 동시에 가사를 평일에 도맡아 하게 됐지만 이것이 결코 바깥일에 준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로서 이걸 제대로 알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내를 양육과 가사를 도맡아 하는 그쪽의 일꾼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룸메이트'라고 가정한다면. 일을 하고 돌아온 당일은 그렇다 쳐도 한숨 자고 난 이틀 동안은 나서서 육아도 가사도 함께하려는 것이 맞지 않을까. 주양육자이자 엄마인 나는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한 번도, 맘 편히 자본 적이 없으며, 맘놓고 피곤해본 적도 없으며, 내 몸이 아플 때조차 아이를 맡아주는 사람에게 부탁조로 겨우 말을 한 뒤에 또 겨우 몸을 뉘었다. 배우자가 있다고, 그 배우자에게 맡기는 게 당연한 듯 자버린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내가 만약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거나 주말부부로 지내는 중 내가 이동이 큰 배우자라고 치자.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 씻고 남편이 해주는 밥 먹고 거실로 행하거나,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내가 아이를 보는 일에 그렇게나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도 당연히 보겠지만, 무엇보다 요리준비며 뒷정리, 주말의 집안일에 '돕는다는 표현을 쓰더라도' '나서서' 할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그동안 아이를 보며 힘들었냐며 쉬게 해주지는 못한다. 나도 분명 고단 했을 테니. 말 그대로 서로 힘들었고, 서로 말 못 하게 견뎠을 그 부분을 알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도 믿음으로 배려하고, 나도 나서서 함께할 것이란 말이다.
방송에서 부부나 양육관련해서 부부가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보면 꼭 그렇게 '서로 힘들다'라고 토로하며 감정이 격해지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또한 양쪽의 입장이 구구절절 이해가 된다. 분명 그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면서도 못내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같은 상황에 닥쳤을 때, 분명 나도 크게 애쓰고, 힘든 게 맞았지만 '나도 힘들다고'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그에는 후회는 없는데 자꾸만 손해 보는 것 같고, 말을 안 하면 영원히 못 알아 처먹고 은근히 갑질할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늘은 남편이 현재 직장에서의 현장을 마무리하고, 다음 현장으로 가기 전에 약 이주가 넘는 시간을 쉬러 오랫동안 집에 오는 첫 번째 날이다. 아이랑 대화하기를, 아빠가 그동안 힘들게 일했으니 아빠를 위해서 파티해 줄까? 뭘 할까?라고 고민하다가 실행으로 옮기는 건 그만두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혼자 아이를 다 키웠는데! 그동안 나도 애썼는데! 그만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는 것은 어쩐지 많이 억울하다 못해 틀렸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에게 말은 꺼냈으니, 파티는 됐고, 소소하게 '케이크라도' (실상은 케이크나) 사기로 했다.
나도 애썼다고, 이거는 네 할 일이라고, 네가 할 일들도 가만히 닥치고, 나는 다 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남편에게 '일해서' 고생했다는 격려의 케이크도 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도, 고마운 것도 많지만, 분명히 잘못된 것도 많다. 아이를 핑계로, 일일이 불만과 갈등상황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게 쉽지않다고 고백하고 변명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이대로 둘 것은 아닌데. 지금으로선 답답하고, 막막하고, 서럽고, 창피하고 어떤 것들은 두렵다. 정답도, 방법도 모르겠고 이쯤이면 꽤 잘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주 갈길만 먼 느낌이 온다.
처음엔 케이크도 사지 말아야지라고 써놓고, 다시 케이크나 사기로 해놨다로 고쳤다. 그렇게 워드는 덮어둔 채 아이를 데리러 가서는 케이크를 샀다. 그 케이크는 일을 완성한 남편과 아빠의 고생뿐만 아니라 다 같이 애쓰며 삶을 살아낸 나와 아이를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구태여나 붙여보기로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나도'로 시작하는 생각이 무한대 고리로 내 안에서 좀처럼 풀릴 생각을 하질 않는다. 어떻게 말을 곱게 할 것이며, 당장 좋지만도 않을 반응에 감당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입도 쉽게 떨어지질 못한다.
아, 이 시대에 삼십 대 젊은 부부로 살고 있는 나는 이런 글이 창피해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