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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kerJ Jul 01. 2022

어머님, 우리 너무 작아지지 말아요.

우리도 우울해질 수 있어요



어머님 생신 선물을 사러 함께 쇼핑을 갔다. 트레킹화를 사고 나서 티셔츠도 같이 보러 갔다. 어머님이 봐 둔 브랜드의 티셔츠는 질이 좋고 디자인이 예뻤다. 그걸 인정하시면서도 어머님은 티셔츠가 비싸다고 하셨다. 그러다 급기야는 직원 앞에서까지 "티셔츠가 좀 비싸서요."하시는 것 아닌가. 직원은 차분하게 이 티셔츠가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근거를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혼자 민망해지고 말았다. 순간 우리가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티셔츠를 사드리고 가게에서 나오면서 어머님께 말했다. "왜 직원 앞에서까지 비싸다고 하셨어요~" 어머님도 머쓱하신 듯 혼자서 말하던 게 직원 앞에서도 나온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돈을 안 버니 아무래도 좀 그렇네." 하고 덧붙이셨다. 어머님이 10년간 운영하시던 가게를 접으신지 2년이 지났다. 아무래도 경제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 어머님을 위축되게 만든 것 같았다. 어머님이 안쓰러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 들어온 티셔츠가 있었지만 차마 살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쓰는 돈은 아무래도 거듭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돈 못 버는 우리 두 사람은 방금 느낀 초라함을 지우기 위해 맛있는 걸 먹기로 했다. 회전 초밥집 레일 앞에 앉아 우리는 잠시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접시에 놓인 음식보다 값이 각기 다른 접시의 색깔을 먼저 보게 되었다. 결국 여기서도 돈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나는 일부러 어머님께 제일 비싼 접시에 담긴 참치를 권했다. 우리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열심히 돈 생각 대신 초밥의 맛을 느끼려고 애썼다. 적어도 나는 그 시도를 반쯤 실패했다. 후식으로 먹은 아이스크림 라떼는 내가 받은 기프트카드로 사서 훨씬 호기로울 수 있었다. 우리는 장마철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커피를 가지고 마주 앉았다.


어머님은 지난달 말부터 최근 한 달 동안을 우울하게 지내고 계셨다. 그 사실을 떨어져 지낼 때는 전혀 티 내시지 않다가 만나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내셨다.

"일도 안 하면서 우울하다는 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싶어 말할 수가 없드라."

스스로 우울을 인정하지 않아도 자꾸만 무기력해지셨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가 되신 것이다. 아가씨가 어머님께 전화해 놀러 가자 해도 내키지가 않아 거절하셨고, 딸이 마음 써주는 걸 아는데도 어쩐지 자꾸 신경질을 내게 되었다고. 어머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꾸 나가서 뭘 하자고 하는 게 귀찮으면서도 힘든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 사이에서 미안해지셨나 보다.

"일 안 해도 우울해질 수 있어요 어머님, 저도 그랬는데요..."

나는 어머님의 우울과 그 우울을 대하는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일과 육아로 숨 쉴 틈 없이 살아가는 워킹맘도 아닌데. 애들이 어린이집 간 몇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으면서도 우울하고 불안해하는 걸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도저히 허락해줄 수가 없었다. 스스로 허락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민망해졌다. 일하고 돌아와 피곤해하는 남편 앞에서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멋있게 써보라'는 남편의 말 앞에서는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우울해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우리는 어느새 돈뿐만이 아니라 우울 앞에서도 작아져버린 것이다. 마치 우울해하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굴었다. 우울할 자유도 허락해주지 않아서 더더욱 오갈 데 없이 외로워졌다. 누군가가 있어주길 바라면서도 얼른 괜찮아지길 바라는 게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나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상태를 조금 지나온 나는 우리 모두가 언제든 우울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받은 도움을 어머님께도 권유했다. 리뷰가 좋은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9월까지 예약이 다 찼다는 말에 우리는 놀랐다. 어머님은 한편으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알고 안심하신 것 같았다. 어떤 걸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해결책이 생겨 좋다고 하셨다.


나 역시 여전히 구겨지고 작아지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날들이 있다. 아마 어떤 훌륭한 치료를 받아도 이렇게 버텨야 하는 날들은 올 것이다. 우리는 결국 버틸 힘을 얻기 위해 도움을 받는 것이다. 힘들어도 햇빛을 쬐러 나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할 힘을 얻기 위해서. 나에게 용기 내서 힘든 마음에 대해 말해주신 어머님께 전하고 싶다.

"어머님, 우리 너무 작아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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