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을 무시한 건 남편이 아니라 나였다
자격지심의 나날들
정확히는 육아로 인해 복직에 실패하고 나서 더 심해졌다.
내 일을 존중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자격지심이.
당장 돈이 별로 안 되더라도 준비하면서 해나가고 있는 일이 분명 있는데 내 일정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들면 좀 짜증이 났다.
아이들 등원 이 후의 내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싶은 마음에 운전을 급하게 하니 남편이 "오늘 급한 일 있어요?"라고 묻는 것에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해진 출근시간 없다고 마냥 여유로운줄 아나?' 하는 삐죽한 마음이 올라왔다.
머리로는 남편이 그런 의도가 있을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남편은 오히려 내 일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지켜보며 피드백을 해주었다.
빈 말을 안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그의 칭찬은 진심으로 기쁘기도 했다.
가족들이나 지인들을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는 나의 가능성과 가진 강점에 대해서 나보다 더 열변을 토했다.
남편의 말대로라면 나는 성공이 보장된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나를 그런 원석으로 봐준다는 것이 기쁘고 자극이 되었지만
이내 그것들은 조바심이 되어 돌아왔다.
주어진 나만의 시간이 결코 적은게 아닌데 어쩐지 손에 잡히지 않고
이리저리 모래처럼 흩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모래들을 내려다보며 좌절스럽고 화난 마음을 안고 아이들을 하원시키러 가야만 했다.
우겨넣은 계획들은 어쩌다 해내는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마치 여행 갈 때 혹시 쓰게 될까봐 쓸데없는 것까지
일단 다 쑤셔넣은 내 캐리어같은 계획이었다.
해낸 것은 없고, 그렇다고 쉰 것도 아니어서
지치고 화난 상태로 아이들을 마주하니 육아도 잘될리가 없었다.
어젯 밤, 이런 나를 지켜본 것 마냥 팩폭을 날렸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세팅하라고.
자신이 어떤 컨디션이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서 일정한 시간 동안 일을 하듯이,
그 우선순위를 잘 사수하라고.
내용이 그리 신선한 조언도 아닌데 나에게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훅 들어오는 피드백이었다. '내 일을 이런저런 핑계로 쉽게 우선순위에서 미루고
다른 일들이 침해하도록 놔두며 무시한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나였구나.'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가장 집중하기 어려운 집 안에서 일하려고 했고,
집에서 밥을 먹다가 보던 영상을 밥이 먹은 후에도 끊지 않고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집안일을 하면서 계획과 무관한 일들을 하기도 했다.
꼭 다른 일을 안해도 집중하는 데까지 버퍼링에 걸리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남편은 집중해서 우선순위를 지키고 시간을 촘촘히 쓰기 위해 드는 비용은 아끼지 말라고 얘기해주었다.
사실 전부터 개인 사무실을 알아보라고 했던 것도 남편이었다.
실제로 공유오피스를 알아보았음에도 쉽게 투자를 결정하지 못했던 건,
돈을 들이면 그 이상의 수입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압박이 무서워서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투자를 해서라도 아웃풋을 만들어내도록 밀어주는게 필요하다.
집중하기 어려운 세팅에 두고 해내라고 채찍질만하는 게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지금껏 경험해왔으니까.
내 일을 우선순위로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좀 더 단호해질 생각이다.
나 말곤 아무도 내 일보다 육아와 집안일을 더 우선시하라고 하지 않았다.
정작 내가 나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했다.
오늘만해도 분명 독서모임 후에 바로 도서관에 가서
계획해둔 작업을 할 계획이 있었음에도
남편이 점심 같이 먹자는 제안에 자연히 응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다시 멈춰 생각해보니 그가 가자는 식당에 오가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을 다 고려하면
아이들 하원까지 내 작업시간은 택도 없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내 결정을 잘 이해해줄 사람임에도 어렵게 거절했다.
이 어려움에도 점점 익숙해져야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요청에 당당해져야겠다.
내가 먼저 존중해야 누군가에게 존중을 요청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