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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의 무한책임 Feb 09. 2022

[한줄책방] 장애아를 둔 엄마는 죄인일까?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1.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누가 봐도 부러울 게 없는 중산층이었다. 네 아이를 낳고 유복하게 산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고 이 가정은 변한다. 다섯째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다. 다섯째 아이는 커가면서 광폭하고 사나워진다. 해리엇은 장애아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 비난은 때로는 암묵적으로 때로는 공공연하게 해리엇을 옥죈다. 남편마저 네 아이를 데리고 별장으로 가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다섯째 아이인 벤과 해리엇. 벤을 바라보는 해리엇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안쓰러움이다. 한편으론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 물론 해리엇이 진심으로 그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벤의 존재가 너무 버거울 때, 해리엇은 잠깐 그런 상상을 하며 그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장애아를 둔 부모 입장은 복잡 미묘할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달라진 것은 해리엇의 삶뿐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모습. 하지만 이 가족의 실상은 과연 무엇이었던 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흠 하나 없는 완벽한 가정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남편 데이비드는 그것을 눈앞에 치우거나, 도피하려 한다. 결국 껴안는 것은 엄마 해리엇이다.      


왜 엄마만 이 달라진 삶의 패턴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는 걸까. 그것도 모자라, 그 변화의 원인이 엄마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주변의 눈초리들을 해리엇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 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 전 그저 죄인이죠!' (p.140)     


당시에 이런 발언을 하다는 것 자체가 가당찮은 것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딸이 오빠들의 앞길을 막고 망친다는 푸념이나 힐난은 최근까지도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으니까. 그렇다면 장애아를 낳은 부모에 대한 주변의 편견과 죄책감은 많이 사라졌을까?      


2. <다섯째 아이>는 음산하다. 책을 한줄 한줄 읽고 있으면 마치 영국 고딕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네 아이를 낳으며 유복하게 사는 것 역시 뭔가 불안해 보인다. 앞으로 다가올 ‘불행’. 다섯째 아이를 미리 알려주는 전주곡 같다.   

   

벤은 다운증후군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굉장히 괴물처럼 묘사되고 있다. 마치 외계의 딴 생명처럼 느껴진다. 도리스 레싱의 작가 후기를 보면 이 소설을 구상할 때 두 가지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빙하시대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내려온다는 인류학자의 글이 첫 번째. 정상적인 세아이를 낳은 뒤 태어난 네 번째 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는 한 기고글이었다.      


이 두 가지 글에 착안해 다섯째 아이를 집필했다는데, 그래서인지 해리엇이 벤을 임신했을 때 느끼는 공포감은 좀 지나치리 만치 생생하다. 나도 둘째를 낳을 때, 두 번째 임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뱃속에 혹시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개구리 같은) 잠시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곧 사라졌다. 하긴 1980년대 후반(도리스 레싱이 <다섯째 아이>를 발표했던 때가 1988년)에 비해 지금은 신문물 의료기술로 아이의 성별, 성장과정, 장애여부까지 알 수 있으니 소설 속 해리엇의 심정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작은 고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이는 뇌성마비여서 늘 큰방에 누워있었다. 그때의 큰방은 지금의 거실과 같은 공간이어서, 손님이 왔을 때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는 성장하면서 작은 고모네 집에 가는 게 불편해졌다. 나보다 3살 아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방바닥에 힘없이 누워 팔만 까딱이며 애쓰면서 고개를 들어 인사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게 어색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점차 고모네 집에 발길을 끓게 되었고, 내가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뇌성마비를 앓았던 큰 아들의 존재로 고모의 가정은- 예를 들어 생활습관이라든지, 가족 구성원이 담당해야 할 일들-  처음부터 다른 집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큰아들이 죽고 난 뒤에도 그 가족의 패턴은 달라졌을 것이다. 고모는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지금껏 살아오는 내내 ‘뇌수막염 아들을 낳고 게다가 먼저 떠나보낸’ 엄마로서 많은 무게를 져야 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이런 가정들이 어디 이 집뿐일까. 모든 가족은 저마다의 패턴과 방향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도 누구도 소외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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