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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의 무한책임 Feb 28. 2022

[한줄책방] 철창 속 호랑이가 뛰쳐나온다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삶과 죽음, 두 경계를 품은 자    

  

1. 사람이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처럼 많은 예술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삶은 일기일회이기에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다. 죽음을 앞둔 그 순간을 죽어보지 않은 사람 외에는 모르기에 우리는 때때로 삶을 부도난 수표처럼 여기며 흔전만전 여길 때도 있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사람은 또 하나의 경계로 넘어가는 자이다. 그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앞두고 있지만, 또한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한때, 좋은 사람들, 행복했던 순간, 고통스러웠던 한 시절, 멋진 풍경들, 수많은 좌절……. 그러한 삶이 있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은 또 다른 경계를 품으며 살아가는 자이다. 남은 삶이 눈물겹게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어떨까. 아니다, 죽음 문턱에서 바라본 삶이 더 중요하다. 이어령 선생은 간절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기에.      

그저 무덤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죽음이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범부의 삶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그래서 소중하다. 잠시나마 그 경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 따져보면 그러한 어록이나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작가가 열심히 살았을 때 쓴 책들이다. 삶이라는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쓴 기록들. 삶이 희미해지고 죽음이 뚜렷해졌을 때, 삶이 삶보다는 죽음의 추로 완전히 기울었을 때, 그 경계에서 쓰인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 문구가 더 가슴에 와닿는지 모른다.      



삶의 마지막에 이토록 명징한 언어라니


2. 이어령 선생의 삶의 말년에 제자와 주고받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21년 10월이었다. 이 책에서 이어령 선생은 자신이 그해 봄에 죽을 것을 예감하고, 죽은 뒤에 책을 내라고 제자에게 당부했지만, 제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사람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선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살아생전에 책을 냈다. 그리고 선생은 2022년 2월 봄을 앞두고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희미해져 가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생생한 경험과 체험이라니. 철창 속에 어슬렁거리던 호랑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달려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제 그 무엇도 그 호랑이를 다시 철창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 호랑이에게 먹히는 것이 끝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임 안 순간. 인간은 어찌해야 될 것인가.      


그러한 절박하고 생생한 순간에 나온 어록이고 기록이다. 혼미하고 두렵고 먹먹한 그 시간에(나로서는 이 시간조차 어떻다고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긴 하다) 이처럼 날카롭게 명징하고 살아있는 언어로 제자에게 삶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선생은 갔어도 육성은 생생하다. 이 책은 수많은 밑줄로 밑줄 그어져 있다. 그의 모든 언어와 사유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머지는 아마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숙제일 것이다. 내 아둔함을 밝히는 선생의 밝은 언어들. 그 언어들은 관념적이거나 순응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고 사납게 날뛰고 읽고 읽는 사람을 도발케 만든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이런 언어를 생산할 수 있는 생명력이라니. 선생은 말씀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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