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인생은 모순이기에 신비롭다
1. 하긴 나도 화(禍)와 복(福) 한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건성으로 보면 둘은 닮았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화와 복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당장 어렵고 안 좋은 처지를 당한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화는 나쁜 것이고, 복은 좋은 것.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이 얼마나 단순하고 위험한가. 삶이라는 것은 이분법으로 가르는 흑백 원리가 아닌 모순을 앞뒤로 내포한 채 그것을 무한 반복하는 뫼비우스의 띠로 이뤄진 것인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 프란츠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 중에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이 있다. 하나는 분명 기쁨이고 하나는 슬픔인데,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되었다. 즉, 사랑의 기쁨의 경쾌한 멜로디 속에는 슬픈 애조의 선율이 있고, 우수 어린 멜로디로 시작하는 사랑의 슬픔 속에는 어느 순간 긍정하는 듯 밝은 선율이 있다. 난 그때 사랑의 기쁨 안에도 슬픔이 있고, 사랑의 슬픔 속에도 기쁨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 인생의 화와 복도, 사랑의 슬픔과 기쁨의 모순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기쁨도 슬픔도 같은 것 아닐까.
우주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책
2.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어록과 인터뷰, 대담 등을 모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5년 전, 한 여름 낮에 읽었다. 차가운 거실 바닥의 시원한 냉기를 즐기며, 선풍기를 쐬며 읽었던 선생의 말씀은 그 냉기보다 더 박력 있고 시원한 말씀으로 내 가슴속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선생의 말씀은 너무 크고 깊어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단박에 이해하기에는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대락 짐작은 했으나, 내가 느낀 세계는 선생이 말하는 것의 약 30% 정도만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30%도 과하다)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다가 몇 번이고 책을 덮고 가만히 그 뜻을 헤아려보았다. 이 책은 내게 우주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책이었다.
단박에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일단 한 번 끝낸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 한 번 더 읽어봐야 한다. 그동안에 숙성된 생각의 앙금들이 그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마치 처음 읽는 것 마냥 생소하고 낯설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은 그렇다.
5년 만에 다시 들춰본 이 책은 생경했다. 열심히 밑줄을 그었던 부분도, 단어의 뜻을 잘 몰라 적어서 풀이해놓은 부분도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뜻풀이를 한 그 단어는 ‘도회(韜晦)’다.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을 숨기고 감춤’이라는 뜻이다) 지금 봐도 생경하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어본다. 이 책이 다시 나를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5년이 지났어도 이 책은 아직도 내게 크고 무거운 책일지도 모른다.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며 그 의미를 헤아려본다.
“자네 말처럼 하게 되면 내 마음에 기심(機心)이 생겨.” 기심은 기는 기계란 뜻이란 말이야.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과 모든 도리를 다 망각하게 돼. 그러니까 하늘이 두렵고 땅이 두려워서 모든 것이 두려워서 내가 수채를 만들고 그렇게 안 하는 거야.
벌써 밥 한 사발 안에 우리가 우주를 영(迎)하는 거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건 뭐냐,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그 비운 마음을 보는 거예요.
자애의 관계라는 건 말이지,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라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모두를 내 몸으로 인정하는 관계예요. 이 자애의 정신이 한 살림의 기본정신입니다.
동고동락한다는 것 자체가 생활이지, 동락만 한다면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재만궁지간(利在挽弓之間), 활을 당기고 있는 무심한 상태 , 그러한 학습과 그러한 평상시의 행위의 그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이란 것은 여러 사람과 더불어서 같이 가는 거다 이 말이에요.
종교에 생명이라는 것의 내용이 없다면 그 종교는 거짓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시인으로 브렌던 케널리라는 아일랜드 사람인데,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이 시인이 쓴 시에 “지옥이란 경이(驚異)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든지 환한 햇살 속에 익어가는 옥수수 밭을 보면서도 경이의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 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런 경이의 감정이 사라진 상태, 즉 ‘지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권력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죽을 때 권력(욕망)이 태어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사회운동가이며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만들었고 생명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