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풍경의 깊이>
분노를 기억하는 일
1. 무엇을 위해서 분노해야 하는가. 분노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니다. 분노를 통해서 더 큰 긍정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허나 때로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분노 그 자체에 매몰되고 만다. 단지 분노에 그치고 만다면, 역사는 망각될 것이다. 우리가 특정한 날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은 그 분노를 기억하려 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 이면에 있는 올바름과 연민, 정의를 기리는 일이다.
폭풍 치고 찬바람 불고 어스름한 제주
2. 강요배 선생의 예술 산문 <풍경의 깊이>를 넘기다 보면 검은 제주가 떠오른다. 만발한 유채꽃, 해사하게 웃고 있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아닌 검은 현무암 바다에 펼쳐지는 시퍼런 바다, 바람소리가 들끓는 시커먼 섬이다. 빨간 모가지를 뚝뚝 흘린 채 선득하게 떨어져 있는 동백.
선생의 작품은 많은 부분 제주 4,3과 이어져있다. 민족의 비극적 역사 앞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주의 혼과 넋을 달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들의 분노와 한을 가슴속에 꾹꾹 새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제주4,3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선생의 예술세계와 추구하는 가치를 엿볼 수 있는 글과 인터뷰 대담도 나온다. 그래도 어째서일까. 이 책의 아무 데나 펼치면 제주의 시퍼런 바다가, 귀를 찢는 듯한 바닷소리가 성큼 달려든다.
선생 말 대로 ‘폭풍칠 때, 찬바람 불 때, 어스름할 때 이게 진짜 제주도’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