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태주 <이 미친 사랑>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의 슬픔
인간은 슬픔을 싫어하지만, 슬픔 속에서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진다. 이때 슬픔은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의 슬픔이어야 한다. 슬픔 속에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보듬을 수 있다.
기쁨은 자칫 사람을 교만방자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기쁨이어야 한다. 나를 잃지 않을 정도의 기쁨,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기쁨이어야 한다.
환호 작약했던 순간도 나를 키웠다. 그러나 나를 제대로 여물게 만들고 깊어지게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오만하고 어수룩했던 나에게 슬픔은 삶의 나이테를 보여주었다. 슬픔을 사랑하면 사람도, 삶도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기쁨이 슬픔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림태주 시인의 산문은 산문도 시가 된다. 인생의 잔잔한 슬픔을 일상적인 언어로 보여준다. 슬픔은 ‘그리움’ ‘외로움’ ‘쓸쓸함’ ‘고독’ ‘안쓰러움’ ‘측은함’과 같은 단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비참하거나 남루하기는커녕, 우리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는 조명이 되어준다.
몇 년 만에 다시 들춰보니 모든 내용이 새롭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난다. 읽었던 책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지만, 그 책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쁨이다. 기쁨과 슬픔은 번갈아가며 내 일상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