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잃고 싶어하는 소녀
감독. 김진유
출연. 김아송, 이린하, 황유림, 허지나, 곽진석,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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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극장에서 보지 못한 한국 독립영화들이 꽤 많다. <도망친 여자>와 <남매의 여름밤> 같은 수작을 놓치지 않았던 건 위안이 되지만 여느 해보다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이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무료 제공한 온라인 VOD 서비스를 통해 <나는 보리>를 늦게나마 감상하였다.
영화를 보기 전 알고 있던 정보는 청각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주인공 여자 아이 보리가 청각 장애인 역으로 나올줄 알았는데, 그녀만을 제외한 가족 구성원 전부가 장애를 가졌다는 설정이 꽤 흥미로웠다. 아버지가 새벽일을 나가서 꽤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래도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보리. 가족 모두가 말을 못해서 그런지,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인지, 보리는 시종일관 묵묵한 첫째 딸의 모습을 보인다. 어느 날 다 함께 거실에서 밥을 먹다가 남동생 정우를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에 보리는 그들에게 은근한 소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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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는 등교 할 때마다 언덕의 절 앞에서 기도를 한다. 친구가 물어도 알려주지 않는 비밀이었지만 외로움을 느낀 이후로 자신도 소리를 잃었으면 좋겠다며 당돌하게 얘기한다. 그 친구는 보리에게 소리를 최대로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라고 하며 여러 시도를 하지만 별 다른 효과는 없었고 보리의 마음만 더욱 심란해져 간다. TV에서 물에 빠지고 나니 귀가 어두워졌다는 인터뷰를 본 후 아버지와 함께 바다를 갔다가 물 속으로 빠져버린다.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보리는 병원에 다녀온 후 부터 안 들리는 척 연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전과는 달라는 소속감에 어느 정도 만족해하는 눈치였으나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고 억울한 점이 많아지자 결국 친구에게 사실을 성토하게 된다. 가족들도 수술까지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은 어느 밤에 그 동안의 울분이 터진 보리의 눈물에 진실이 탄로난다. 학년 중 축구를 제일 잘하던 정우가 축구 대회에서 전술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부당한 이유로 후보에 그치자 발끈한 보리는 감독과 친한 친구 아버지께 도움을 구한다. 결국 주전으로 출전한 정우가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는 모습을 가족들이 다 같이 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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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영화 전체에 자막이 있었다는 것. 세상에는 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수화' 라는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적을 것이라고 느꼈고 언젠가는 꼭 배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어린 학생의 순수함을 장애의 경험이라는 면에서 잘 이용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온 보리의 억울함 혹은 소외감이 배우를 통해 잘 느껴져서 좋았다. 중국 음식 배달을 하는 장면들을 통해 보리의 심경 변화가 잘 드러났던 것도 매력점이었다.
이 영화를 보니 <재꽃>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는데, 이 영화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둘의 외로움이 비슷한 결은 아니지만 담담한 표정이 닮아서였을까 자꾸 떠올랐다. 바닷가 마을이 주는 안락함이 좋았다. 특히 마지막에 차분한 롱샷이 기억에 남는다. 구부러진 도로의 끝에는 항상 곧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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