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은 Aug 23. 2021

보시면 좋겠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학생이 노트에 붙여둔 쪽지

8월 11일 수요일, 원장님이 안 계시던 학원 방학 하루 전 날, 진지하게 학원 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었다.


중3 남학생들 때문이었다. 그 나이 남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는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걸 직면하는 건 내게 아직 버겁다.


학생들이 원장님께서 안 계시다는 걸 크게 의식하더니, 처음에는 수업 중 장난이 오가다가 나중에는 음담패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수업 초반에는 나도 조용히 하라며 학생들을 제지하고 수업을 이끌어 가보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이 상황이 너무 버겁게 느껴져서 말없이 혼자 수업을 했다.


어떻게 해도 이 수업 분위기를 뒤집을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수업 중 뛰쳐 나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책임감에 끝까지 1시간 10분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고 나와서도 당혹감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양한 학년들과 많은 수업을 했지만, 이런 당혹감은 처음이었다.



학원 방학이 그렇게 시작했고, 나는 이 일로 학원 강사로서 학생들을 휘어잡을 능력이 없는 내게 이 직업이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조잘대며 일상을 공유하는 다른 학생들을 생각했다. 학원 강사를 그만두면, 그런 귀여운 학생들의 일상 또한 들어줄 수 없었다.


'나에게는 또 나에게 맞는 학생들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그 하루의 수업으로 내게는 재밌는 이 직업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 방학 마지막 날, 원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중3 남학생들의 처벌은 원치 않고, 중3 수업을 필요한 최소한으로 하고 싶다고.


원장님께서 문자로, 본인이 잘못 가르친 탓이라며 사과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내일 출근해서 이야기 나누자고 하셨다.


다음날, 원장님은 중3 수업은 다 빼주려고 하셨다. 다만 이 말씀은 하셨다. 학생들을 이겨내지 못해서 학원 강사를 그만두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그 말씀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한 번 이겨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한 번은 중3 수업을 들어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말씀드렸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 되나 했다. 오늘, 평소처럼 중3 학생들의 노트를 검사하다가 테이프로 쪽지가 붙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보시면 좋겠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나한테 쓴 쪽지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호기심에 테이프를 뜯어 쪽지를 열어봤다. 예상치 못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8월 11일 수업에 본인이 적절치 못한 언행을 했고, 수업을 어수선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그게 마음이 걸렸다고. 친구들을 웃기고 싶었고 학원 방학 하루 전 날이어서 너무 들떠서 그랬다고, 앞으로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겠다고.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질 뻔 했다. 중3 남학생들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그 수업에서 그런 언행을 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이 괴로웠는데, 학생의 진심이 내게 닿자 그 모든 게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의 노트에 싸인을 하고 몰래 한 마디 적어 놓았다. '쪽지 고마워 : )'


부디 그 학생의 불편한 마음이 나의 짧은 한 마디에 편해지길 바라며, 오늘은 따뜻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은 범상치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