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련님, 황달식 -4-
핑계는 아이의 몫
조카는 엄청 활발하고 귀여웠다. 그 나이 또래가 다 그렇듯, 개구쟁이 남자애였다. 집 밖에서만 활발한 게 아니고 집 안 전체를 들쑤시고 다녔다. 낮이나 밤이나 잠도 자지 않고 온 집 안을 하도 쿵쿵거리고 뛰어다녀서 아랫층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처음엔 도련님도 순순히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어쨌든 아이가 잘못하긴 했으니. 자려고 누웠는데 윗집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려 도저히 잘 수 없다면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하지만 아랫층은 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올라와서 시비를 걸었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뛰어다닌게 맞으니 도련님은 그때마다 너무도 죄송하다고 했다. 아랫층은 도련님에게 온갖 짜증을 낸 후 발소리를 탁탁 내면서 돌아갔다.
어느날, 조카가 네 시간동안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지칠대로 지쳐 오랜만의 단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김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도련님은 설마 했다. 하루종일 온 가족이 수영장에 가느라 집은 내내 비워진 상태였다. 조카는 이미 차에서부터 곯아 떨어져 집 안에선 발조차 디딘 적이 없었다.
아이가 뛰지 않았는데도 아랫층에서는 다짜고짜 올라와서 시끄러워 돌아버릴 지경이라며, 애 단속을 똑바로 시키라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모처럼 잠들었던 조카가 깨어났다. 도련님은 오랜만에 빡이 쳤다. 이 집에는 온종일 아무도 없었다니까요? 우리 애는 잠들어서 이제 깼다구요! 아랫층은 아랑곳하지 않고 빽빽 소리치며 본인의 짜증과 화를 도련님에게 쏟아냈다. 도련님도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항상 굽신거리던 도련님이 자신에게 맞서자 아랫층 사람도 더욱 열이 받아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었다.
"네 그 돼먹지 않은 애새끼 간수를 잘 해야 할거 아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도련님의 이마에 퍼런 핏줄이 솟았다. 살기어린 눈으로 쏘아보자 아랫층은 움찔했으나 그깟 자존심이 뭔지 계속 언성을 높였다. 차라리 말이 헛나왔다고 하고 그쯤에서 내려갔다면 좋았을 것을.
"선생님께서는 오늘 종일 집에 계십니까?"
도련님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니가 무슨 상관이냐는 아랫층의 빈정거림에 도련님은 준비해서 사죄의 의미로 보답을 좀 하겠다고 했다. 보답이라는 단어의 보편적인 의미를 생각한 아랫층은 외출 예정이 없다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다. 도련님은 조용히 동생들을 불렀다.
"큰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만 시키자."
무슨 일이냐는 동생들에게 층간소음 때문에 아랫층에서 항의가 들어오는데, 오늘은 집 안에 아무도 없었는데도 항의를 했다고 하자 동생들은 난리가 났다. 감히 우리 형님께,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이신데, 법 없이도 살 분이신데 등등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점점 흥분해가는 동생들을 도련님은 진정시켰다. 이웃들 보는 눈도 있으니 조용히 처리하자. 동생들은 그 말을 잘못 이해했다. 아랫층을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아파트 주차장에 까만 세단 승용차 10대가 나란히 들어왔다. 썬팅을 어찌나 진하게 했는지 누가 봐도 수상했다. 경비아저씨가 계셨다면 막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그날 다른 아파트 동에서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민원이 들어와 우르르 그 곳에 가 있었다.
시커먼 양복을 입고 저마다 배트며 각목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내렸다. 30명이 넘는 인원 중 일부는 엘리베이터로, 일부는 계단으로 아랫층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혼비백산을 했다. SNS가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누군가 핸드폰으로 촬영할 법도 한데,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다들 시선을 내리깔고 도망가기 바빴다.
아랫층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영문을 모르는 아랫층은 순순히 문을 열었다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동생들은 집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눈에 보이는 살림살이를 모두 깨부수기 시작했다. 현관에 놓인 화분이 날아가고 벽에 고정된 청소기가 두 동강이 났다.
식탁이 엎어지고 의자들이 나뒹굴며 식탁 위에 있던 반찬통들이며 컵들이 떨어지며 깨졌다. 대형 QLED TV의 액정이 깨지고 냉장고엔 깊은 흠이 파였다.
아랫층은 무슨 짓이냐는 항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주저 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난리통을 피고 있는데 어느집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층간소음이 되지 않는 아파트인데도 온 동네가 잠잠했다. 집들마다 불이 다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단지 같았다.
한창 난리를 치고 있는데 도련님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려왔다. 도련님을 보자 동생들은 일렬로 서서 90도로 인사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며 플라스틱이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 아 이 병신같은 새끼들, 조용히 처리하라니까 이게 뭐야!!"
도련님은 슬리퍼 신은 발로 가까이에 선 동생 하나를 세게 찼다. 동생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며 깨진 유리를 손으로 짚어 피가 철철 났다. 아랫층은 그 꼴을 보고 오줌을 쌌다.
"죄송합니다, 형님. 지금이라도 근처 산에 조용히 파묻어 버릴까요?"
"묻긴 뭘 묻어 새끼야!!"
쓸데없는 말을 한 동생도 발로 차였다. 슬리퍼 채로 아랫층 주인 앞까지 걸어온 도련님은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애들이 말귀를 못알아들어서...어떻게 변상을 해드려야 할지...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저희 집으로 올라오셔서 상의하시죠. 야, 가자!"
다들 각목과 배트를 챙겨 신속히 그 집을 나갔다. 솔직히 그 정도로 난리를 쳤으니 뉴스나 고발 프로그램에는 나올 줄 알았다. 아니면 최소한 경찰이라도 방문해서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졌어야 했다.
하지만 아랫층은 경찰에도 신고하지 않고 신문이나 TV에도 제보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인터넷이나 SNS에도 올리지 않았다.
로얄층이었는데도 시세보다 5천만 원이나 싸게 급히 집을 부동산에 내놓은 아랫층은 그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싸게 올렸는데도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참 뒤에 집이 나갔고, 아랫층 사람은 아무리 조카가 집에서 뛰어다녀도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도련님은 자신이 사건의 주동자인데 모든 화살을 애꿎은 조카에게 돌렸다. 이놈새끼 때문에 동네 망신을 당했다며 나와 남편에게 한탄했다.
집 앞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면 옆집 사람들은 계단으로 걸어가거나 타지 않고 슬그머니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듣고 있던 우리는 21세기에 일어날 만한 사건인지 너무 혼란스러워 못들은 척 했다. 동네 망신을 과연 도련님이 당한 게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그정도면 도련님이 동네를 통째로 망신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그 망신을 도련님과 핏줄인 우리가 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도련님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
"형수님도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 생기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우리는 그 날부터 도련님의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 같은 부류로 얽혀 괜히 엄한 누명이라도 쓸까 두려웠다. 만날 일이 있으면 우리집이나 집 밖에서 만났다.
그리고 도련님은 곧 정말로 조카 때문에 동네 망신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4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