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얼굴값을 한다,였다. 이미 한참 전에 불혹을 넘긴 나 같은 늙수그레한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베트남 여자와 국제결혼을 꿈꾸는 젊은 남자들이 많았다. 최근 국제결혼을 원하는 한국 남자 나이 때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 추세라 하니 나 같은 사람은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호기심에서인지 국제결혼을 원하는 20대, 30대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열심히 한번 골라보려 했는데, 역시 나 같은 남자를 원하는 여자는 없었다. 한국에서나, 이곳 베트남에서나. 학교에서나 또는 사회에서 남편으로 재테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분명했다.
어릴 적 교과서보다 괭이를 먼저 집어 들어야 했던 나는 그토록 꿈꾸던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넣지 못한 채 번번한 직업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다. 학교만큼은 졸업하고 싶었으나 농사일은 항상 일손이 부족했다.
철마다 쉬는 날이 없었다. 그나마 먹고살만해지나 싶으면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결국 화투 몇 장으로 몇 안 되는 땅을 날려먹고 내친김에 농약도 같이 삼켜버린 아버지를 대신하여 간신히 밥벌이를 이어나갔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는 시대에서 중졸의 학력을 받아줄 곳은 흔치 않았다.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었다면 삶이 좀 나아졌을 것을. 내 또래 친구들이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할 때 난 오토바이에 올라타 검게 엉겨 붙은 짜장을 배달했다.
식사시간이 일정치 않아 대부분 굶주려 있었기에 배고픔과의 싸움은 치열했다. 짜장 그릇을 찾으러 가서 바닥에 흐르듯 남은 짜장과 몇 가닥의 면발을 발견하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후루룩 핥았다. 초라해진 기분은 잠시뿐 꺽, 하고 올라오는 신물 나는 트림이 그래 그깟 자존심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듯했다.
이따금 미칠 듯이 외로워지면 다방에서 껌을 맛깔나게 짝짝 씹고 허벅지가 펑퍼짐한 미스 김이나 불러내 달큼한 커피 몇 모금으로 진한 외로움을 삼켜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삶을 하루하루 이겨내기도 벅찬 내게 평범한 삶은 과연 사치였을까.
주유소에서 차도 닦아보고, 식품공장에서 바지락 알도 발라내고, 가끔 공사현장에서 벽돌도 날라보며 그렇게 덧없이 지나간 청춘의 세월은 구김이 되어 내 얼굴 위에 늘러 붙었다. 그나마 여기까지 날 떠민 건 죽기 전 며느리와 손주를 기대하는 구부정한 어머니의 간절함이었다.
치열하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내게 결혼은 닿을 수 없는 이상과도 같았으나 그래, 못난 놈이라고 색시 얻지 말란 법은 없지, 옆 동네 사람 구실 못하는 춘식이도 중국에서 색시를 얻어 자식새끼도 키우는걸, 한 번 결심하고 나니 나머지는 술술 풀리듯 쉬웠다. 국제결혼 업체에 돈만 갖다 주면 착착 알아서 서류도 준비해주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덧 이 나라까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