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에는 인어공주가 산다 -6-
그는 새벽처럼 나타나 자정으로 잠든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분명 오랫동안 J를 보지 못해서 기억 속의 그의 얼굴이 흐릿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난 J는 불과 어제 만난 듯 친숙한 느낌이었다. 통통한 볼살과 곱슬머리에 다갈색이 많이 섞인 눈망울, 가느다랗게 보이는 동공까지...
우린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방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어를 본 것보다도 J를 다시 만난 게 내겐 더욱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J, 너 정체가 뭐야?"
J는 천진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아줌마, 아직 레이나를 만나지 못했군요."
동문서답까지 여전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레이나가 아닌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낸적이 없는데 J는 연이어 말했다.
"레이나는 낮 시간대에 나타나요. 지금 보고 있는건 아리아예요. 밤의 수호자죠. 아리아의 노랫소리는 절망을 녹여줘요."
하천의 자갈을 닮은 피부색의 아리아는 J가 다가오자 수면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우아했고 유연했다. 나는 달빛을 받은 그녀의 꼬리가 채도가 낮은 무지개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J, 네 엄마를 만났는데 말야..."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J의 눈빛이 조금 더 쓸쓸해졌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띈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J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J의 걸음걸이는 달빛의 은은함을 닮은 빛과도 같았다. 나는 살짝 비켜주었지만 J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서 징검다리 끝까지 걸어갔다. 스쳐 지나갈 때 그의 온기를 또 분명히 느꼈다. 나는 급히 J를 쫓았지만 그는 한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멀리 서있는 J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나는 조바심이 났다.
"J, 네가 루시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예요."
J는 내 말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
J가 천천히 팔을 올리자 다시 수면 가까이 은색 비늘이 나타났다. 아리아가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벌렸다.
"어서 노래를 따라 부르세요. 절망이든 불행이든, 굳기 전에 녹여버리는 게 좋으니까요."
아리아의 혀가 다시 꽃처럼 피었다. 큰 폭포소리 같기도 하고 세찬 물살소리 같기도 한 신비로운 울림이 퍼졌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니, 따라하려고 애써 보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인어의 노래에는 음정도 가사도 없었다.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어 보았지만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J가 내게 천천히 걸어와 자그마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놀랍도록 따스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J의 눈동자 가득한 갈색의 미세한 감정이 내 마음을 감쌌다. 그는 눈으로 나를 안심시키며 입을 벌렸다. 빨간 혀가 살아있는 듯 허공에서 움직이는게 보였다. 혀는 단독의 생명력을 가진 듯 펄떡였다. J의 입에서 인어가 내는 것과 비슷한 파도 소리가 났다. 나도 J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내 입에서 폭포와도 같은 소리가 났다.
내가 내는 소리를 나의 귀로 들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응어리졌던 무엇인가가 탁 하고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태초의 답답함이기도 하고 거대한 고단함이기도 했다. 나의 우울감이나 혹은 불안감, 절망 속 끝이 보이지 않던 장벽들이 천천히 녹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J는 계속해서 인어의 울림을 따라했다. 인어의 소리와 나의 소리와 J의 소리가 삼중주로 울려퍼지며 하나의 화음을 만들었다.
내가 가진 모든 어찌할 수 없는 마음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불만들, 사소한 것으로부터 쌓인 나를 갉아먹는 감정들이 손 끝, 발 끝으로 천천히 내몰아가고 있었다.
아리아는 나와 J의 주위를 천천히 돈 후 우리를 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중랑천 바닥으로 잠수했다. 그녀의 꼬리가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은빚 비늘이 온통 달빛으로 은푸르게 빛났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나른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J에게서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는데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었는데도 거짓말처럼 그가 사라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아쉬움과 허탈감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 6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