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를 처음으로 만난 날은 날씨가 굉장히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는 키가 컸고 당당했다. 당시 난 화장품 가게에서 화장품을 파는 일을 했다. 그는 내게 다가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번호를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B에게선 진한 페라리 블랙 향이 났고 그것은 A가 데이트 때 종종 뿌리던 향수였다. A를 잃은 공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는 순순히 번호를 넘겼다.
그땐 B가 사귄지 3년 된 여자친구의 생일선물을 사러 가게에 들린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처음에 나는 B를 경계했다. A에게서 받은 상처는 씻겨 나가지도 않은 채 올가미처럼 내 목을 죄는 듯했다. B는 급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길게 두고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댄디하고 여유있으며 매너도 있었다.
그는 여심을 잘 알고 있었고 근사한 차를 몰았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으로 나를 데려가 기분전환을 곧잘 시켜주었다.
종종 그는 교외의 남한강이 근사하게 흐르는 카페에 데려가거나 핑크뮬리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맛집에 데려갔다. A와 사귈 동안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메뉴의 음식들을 그를 통해 맛보았다. 프랑스식 가정요리인 포토푀와 부야베스, 이탈리아의 플로렌스풍 요리를 와인과 함께 먹었다. 그는 영어로 길게 씌여 읽지도 못하는 메뉴판을 보고 유창하게 주문했다. 그런 모습이 멋있었다.
B는 여자들이 관심있어하는 주제의 대화를 재미있게 리드했다. B는 경계하지 않아도 될 만한 남자라고 믿었다. 나의 시시콜콜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상을 귀를 기울여가며 잘 들어주었다. 나보다 나의 일상을 더 잘 기억해주었다. 세심한 그의 모습에 점차 나의 마음이 열렸다.
B와 나는 11살 차이였다.
그는 동년배의 남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해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존경스러웠다. 내가 내 또래의 고민을 상담하면 그는 항상 올바른 제안을 해주었으며 그 대답은 대체로 옳았다. 때로 그는 선생님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하였다. 그는 외부모로 자란 나의 외로움을 잘 충족해주었다. 수시로 짧고 간결한 연락을 취해 주었으며 감정표현을 풍부하게 표현했다. 그와 있으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여자가 된 듯 했다. 그는 이해심이 넓었다. 인과 없는 나의 짜증과 변덕스러움을 모두 받아주었다.
나는 정말로 B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는 따뜻하게 웃었으며 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A처럼 나를 곤란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일들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이 많았다. 그는 회식이 잦았고 종종 야근을 했으며 저녁시간 때 각종 회의와 프로젝트를 이유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는 회사일을 핑계로 출장을 갔으며 가끔 나와 보지 않은 영화나 나와 가지 않은 카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와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 일주일 간 나는 그가 해외출장을 갔다고 믿었다.
그것이 그가 간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밤중에 나의 전화가 울린 그 날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