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것을 본다〉-4화-
논현동에 가면(지금이야 서울에 여러 지점이 생겼지만) 유독 손님이 끊이지 않는‘ 투뿔등심’이라는 고깃집이 있다. 당일 예약은 받지 않는데도 강남의 트렌드세터들이 몰려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A++ 소고기만 판매한다 해서, ‘ 투뿔’이란 상호를 사용했다는 브랜드 스토리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간 그곳의 고기 맛은 생각보다 감동적이지 않았다. 물론 육질은 뛰어났다. 하지만 강남에는 워낙에 맛있기로 유명한 고깃집이 많지 않은가. 도대체 이 고깃집만의 비밀은 무엇일까. 가만히 보아하니 고기가 아닌 술에 있었다. 투뿔등심은 손님들이 자기가 마실 술을 가져오는게 가능했다. 웬만한 단골이 아니고서야 음식점에 술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게다가 와인이라니.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와인 한 병당 코키지를 몇만 원씩 받기도 하는데, 투뿔등심에서는 가져온 와인을 아무런 비용 없이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데다 와인잔 제공은 물론 친절한 서빙까지 따라붙는다. 기념일이나 특별한 모임이 있는 날이면 와인을 들고 오는 손님들을 더욱 많이 볼수 있다. 생각지 못한 친절함에 대한 고마움과 원하던 술을 마음껏 즐기는 흥겨움 때문인지, 이곳의 주 메뉴인 고기는 다른 곳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주문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투뿔등심은 왜 이러한 전략을 사용했을까. 경쟁자들의 장점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강점을 만들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이배용 위원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차별화란 경쟁자로부터 상대적으로 달라지려는 노력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지닌 장점의 주체적인 발전이다.” 나는 이 주장이야말로 모든 브랜드 전략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제품을, 서비스를,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즉 판사가 아닌 변호사에 가깝다. 그럼에도 매번 객관성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약점을 보완하려는,‘ 평균을 향한 강박’에 빠진다. 시장 상황, 소비자 기호, 라이프스타일, 경쟁사 제품 등 시류에만 집중하다 오히려 정체성과 강점을 잃어버린다. 끝까지 살아남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강점으로 똘똘 뭉친 자신만의 정체성에 집중하자. 그래야만 고객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2000년대 초, 맥도날드는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웰빙과 다이어트의 열풍을 맞아 창사 이래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결국 시카고 본사에서는 나날이 하락하는 매출을 커버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소비자의 건강을 고려해 소위 웰빙 메뉴들을 전면에 내세우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비만 탈피라는 명목으로 햄버거에는 야채가 더 많이 투입됐고, 메뉴 사이즈나 내용물은 이전보다 소량으로 편성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알다시피, 맥도날드 본사의 야심찬 시도는 매출에도 소비자의 인식에도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시 버거킹의 전략은 어떠했을까. 애초부터 맥도날드 보다 사이즈도 크고 열량도 높았던 버거킹은 전혀 트렌드를 좇지 않았다. 여전히 높은 열량과 포만감을 강조하는 버거로 밀고나갔다.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고, 소비자들을 따라오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버거킹은 큰 어려움 없이 소비자들의 지속적인 선택을 받았다.
뒤늦게야 맥도날드 경영진은 반성을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맥도날드의 모든 메뉴를 패스트푸드로 인식할 뿐이지, 웰빙 음식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맥도날드에 오는 이들이 무얼 먹어야겠다고, 즉 특정 메뉴를 미리 정하고 오는 일은 거의 없다. 매장에 와서 메뉴를 보고 고른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한 끼 식사로 충분할뿐더러, 더욱이 빠르게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웰빙 메뉴를 먹으려고 맥도날드에 가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맥도날드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메뉴를 원래대로 되돌렸고 줄였던 양도 늘렸으며 오히려 푸짐한 메뉴를 더 추가했다.
최근 버거킹의 행보 역시 흥미롭게도 맥도날드와 유사하다. 버거킹 코리아는 얼마 전 패밀리 레스토랑 출신의 CEO를 기용하면서 기존 와퍼와는 차원이 다른 블랙라벨의 버거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제 버거가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패스트푸드로서는 가장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띤 버거킹의 장점을 살려 프리미엄 시장으로 진입하려는 의도다. 숙고해서 내놓은 전략이겠으나, 나는 이 시도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소비자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버거킹만의 서비스나 제품과 달라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패스트푸드 서비스에 길들여진 종업원들이 수제 햄버거 레스토랑의 서비스와 품질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그것도 동시에 패스트푸드 제품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수제 버거 시장이 탐나면 차라리 별도의 브랜드로 레스토랑을 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버거킹 대표 버거인 4,900원짜리 와퍼 대신 8,000원짜리 블랙 버거를 팔려면 제품의 질만 높여서는 안 된다. 그에 걸맞은 서비스와 레스토랑이 필요하다. 나 역시 2004년 피자헛에 근무하던 당시, 정체되어 있던 피자헛 레스토랑을 개선하기 위해‘ 피자헛 플러스’라는 준 패밀리 레스토랑 컨셉으로 시범 매장을 몇 개 운영한 적이 있다. 패스트푸드 시스템에 익숙한 직원들만으로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힘들고, 고객들 역시 낯설어한다. 자신의 본질적 장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실감한 경험이었다.
SWOT분석은 이제 기업에서 일상적인 업무가 됐다. 신제품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매번 내부와 외부의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기를 따지고 든다. 여기까지는 바람직하다. 그런데 SWOT분석 이후 우리는 매번 약점에 더 주안점을 둔다. 어떻게든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이다. 앞에서 본 맥도날드가 그러한 경우일 것이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강점마저 약화시키는 그릇된 판단이다. 다시 말하지만 약점을 보완할 시간에 강점을 강화하는 게 훨씬 더 유리하다.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났다고 본연의 강점을 포기한다면, 이는 전진이 아니라 후퇴다. 피자헛을‘ 웰빙’이라는 키워드와 엮었을 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름기를 쫙 뺀 웰빙 스타일 피자는 오히려 피자 같지 않다는 여론이 일었다. 미국의 KFC도 웰빙 여파에 못 이겨‘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에서‘켄터키 그릴드 치킨’으로 주력 제품을 변경했지만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말았다. 새로운 것을 좇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기존의 고객마저 떠나보내기 쉽다.
새로운 시장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차라리 새로운 브랜드로 승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의 브랜드 전략 차원에서도 유용할 것이다. 조직생태학의 대가인 스탠포드 대학의 마이클 해난 교수 역시 “한 업종의 모범사례를 다른 기업들이 다 따라 하면, 결국 기업간에 차별점이 사라진 채 경쟁만 심화된다. 남들과 똑같은 전략이나 시스템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시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품의 강점을 살리려면 판사의 시선보다는 변호사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 판사는 어떤 존재인가.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을 종합하여 객관적으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 검사와 변호사처럼 사건에 깊게 개입하기보다 법정에서 제기되는 논리적 주장을 보고 판가름한다. 그들의 업무적 특성이다. 이에 비해 검사와 변호사는 각각 원고와 피고의 관점에서 사건에 매우 깊숙이 관여한다. 특히 변호사는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 법정에서 강점이 될 만한 증거들을 모으고 논리를 쌓는다. 자연히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인 시선에 가깝다. 판사가 두루두루 사실을 취합하며 넓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변호사는 논리적인 승리를 따내기 위해 깊은 시선으로 집중한다. 나만의 강점, 기존의 장점을 지키고 강화하는 능력은, 좁지만 깊은 변호사의 시선에서 얻어지는 법이다.
수많은 브랜드들이 지금 이 순간도 불안에 떨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강점은 믿지 못한 채, 경쟁사의 변화만 예의주시하고 있는것이다.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가 잘나가는 걸 보면서 본연의 강점과 정체성마저 포기하며 승부하려는 강박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