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것을 본다〉-5화-
혹시 20세기 최고의 뮤지션이라 불리는 비틀스 멤버들이 악보를 전혀 그릴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음계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바로 녹음기에 대고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오선지는 없었어도 항상 기타를 들고 다녔기에 언제 어디서든 작곡할 수 있었다고. 지금의 비틀스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는 폴 매카트니가 잠결에 떠올린 멜로디에서 출발했다. 악보를 못 그리니 악상을 잊어버릴까 두려워 몇 주 동안 말도 안 되는 가사를 붙여서 부르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디 비틀스뿐이랴. 완벽한 인재라서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다.
바느질에 서투른 의상 디자이너도 런웨이에 모델을 세울 수 있다. 바느질과 재단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니까. 설계도면을 못 그리는 건축가, 시나리오를 못 쓰는 영화감독도 얼마든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한 명의 천재가 가진 아이디어보다 여러 사람의 지혜Collective Wisdom가 더 낫다.”는 《메이커스》의 저자 크리스 앤더슨의 말처럼, 이제 모든 장르는 종합예술화되고 있다. 그럴수록 더욱더 필요한 능력이 있다. 바로 전체를 읽는 힘이다. 경계가 무의미한 시대에는 메커니즘을 거머쥐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
사실 나는 오비맥주에 입사하기 전까지 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맥주를 엄청나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맥주집에 가는 평범한 고객에 불과했기에, 주류시장의 생리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사실 피자헛에 입사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피자는커녕 이탈리아 음식에 관해서는 오히려 문외한에 가까웠다. 맥도날드에서 근무하기 전까지도 내게 햄버거는 단순한 음식이었을 뿐이다. 외식업에서 종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시장의 흐름을 읽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관심의 대상만 달라졌을 뿐 판을 읽는 방식은 똑같으니까.
오늘날 제조회사들의 기술력은 다들 엇비슷한 수준이다. 과거에는 선두주자가 신기술을 개발하면 후발주자가 쫓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리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었다 해도 6개월이면 비슷한 제품이 따라나온다.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을 지켜내기가 더 어려운 시대, 승부의 추는 전체를 보는 힘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브랜드와 서비스를 하나로 연결해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필연’의 결과로 만드는 것이다. 애초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생각하자. 오로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만 있을 뿐. 그러려면 파도가 아닌 바다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때‘ 나이키의 경쟁 상대는 닌텐도’라는 말이 일종의 법칙처럼 유행한 적이 있다. 닌텐도 게임이 워낙 대세이던 시절, 사람들이 모두 거실 TV 앞에 모여 있느라 밖에서 운동하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하지만 대세는 다시 나이키 쪽으로 기울었다. 나이키도 아예 운동화에 게임기를 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2006년 나이키와 애플이 합작해 만든‘ 나이키플러스’다. 나이키플러스는 운동화 밑창에 GPS 센서를 부착해 운동 속도와 거리, 칼로리 등의 데이터를 아이폰 기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게 만든 시스템이다. 사람들은 50달러면 살 수 있는 운동화를 100달러 넘게 지불하면서도 나이키를선택했다. 자신의 운동량을 자동으로 측정할 수 있는 데다 어느 곳을 달렸는지도 친구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칩 하나로 조깅이 몇 배는 더 즐거워진 것.
나이키플러스는 신제품을 갈망하던 직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였지만, 더 좋은 기능의 운동화를 만들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조깅하던 사람들을 관찰하던 중 하나같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달린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이팟 사용자의 50%가 음악을 들으며 뛴다는 것도. 나이키플러스에 대한 초기 반응은 희한한 서비스가 나왔다는 것 정도였다. 자칫하다가는 일부 얼리어답터들의 전유물에 그칠 수도있었다. 하지만 나이키는 다시 한 번 전체적인 흐름을 간파했다. 조깅은 원래 홀로 달리는‘ 외로운’ 운동이다.
나이키는 조깅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는 점에 착안해,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기를‘ 공유하는’ 재미를 추가했다. 뒤이어 출시된 손목시계 형태의‘ 나이키플러스 퓨얼밴드’ 역시 이러한 재미를 배가한다. 센서가 파악한 운동량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이 제품은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PC 등과 클라우드로 묶여있어, 친구를 맺은 이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 안성맞춤이다. 잘하면 축하도 해주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다른 이들과 시합도 한다. 나이키플러스는 현재 700만 명이 넘는 이용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퓨얼밴드는 미국과 영국에서 출시되자마자 완판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혁신적인 기술이 아니라 시장의 흐름을 읽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자랑하는 나이키는 더 좋은 품질의 제품에 집착하는 대신,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주목했다.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대신, 디지털 상에서 함께 나누고 참여하고 싶어 하는 스마트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IT와 제조업의 만남이라는 단순한 영역 파괴가 아니라, 나이키만의 인사이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