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석 Apr 17. 2018

모든 이야기엔 시대성이 담겨 있다

〈나는 다른 것을 본다〉-6화-

상상의 힘 VS 관찰의 힘


상상력, 창의성, 창조성.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야기되면서 언젠가부터 상상의 힘을 들먹이는 일이 잦아졌다. 상상력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거늘 상상의 힘을 과신하기 시작했다. 상상력의 의미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아졌다. 책상을 지키고 앉아 머릿속으로 자유롭게 상상하면 온갖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도출될 거라는, 믿기 어려운 속설이 번진 것이다. 사회에 이제 막 발을 들인 젊은 친구들에게조차 이 미신을 과대하게 주입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많은 대학생들이 상상의 힘을 믿고 각종 공모전에 덤벼든다. 물론 상상력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폄하하는 건 아니다. 상상력은 미래를 설계할 핵심 수단이다.

하지만 상상력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상력의 출발 지점은 경험이다. 즉 손과 귀, 눈에서부터 상상력이 시작된다. 더 많이 봐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고, 더 많이 들어야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더 많이 접해봐야 접하지 못한 경험마저 실감할 수 있다. 창의적인 본능이라는 것도 경험과 관찰이 있어야 생겨난다. 상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현장 대신 책상으로 향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실제 책상에서 태어난 오류들 때문에 인간이 고생한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현장에서 벗어난 생각은 상상이 아니라 몽상, 공상, 미몽에 가깝다.


우리는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보고, 들으며 접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을 것인가. 나는‘ 시대성’이라 답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시대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시대성에는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넘어선 심리가 담겨 있다. 곧 시대성을 읽는다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숨겨진 마음을 읽는 일이다. 시대성을 기반으로 나온 아이디어는 그 어떤 것보다 보편적이고 쉽게 퍼진다.


만화 《미생》은 이례적으로 온오프라인 모두 성공한 콘텐츠다. 2013년까지 50만 부 이상 판매됐으며, 포털사이트 다음daum의 누적 조회건수는 10억 건을 넘어섰다. 각종 콘텐츠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4년 하반기 드라마 제작도 잡혀 있고, 광고에도 삽입될 정도로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실 바둑의 기보를 인생에 대한 해석으로 접근한 만화가 그리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미생》의 성공 요인은 저자의 뛰어난 관찰력에 있다. 사무직과 현장직의 거리감, 부서 간의 알력, 수습과 비정규직의 비애, 피할 수 없는 동기들 간의 경쟁까지, 《미생》에는 직장인이 아니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디테일이 살아 있다. 동시에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버텨야 하는 직장인들의 불안함이 묻어난다. 이를 위해 《미생》의 크리에이터 윤태호 작가는 3여 년 동안 취재와 인터뷰에 전력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인사이트를 제시한다.

만화 '미생'

“먼저 시대를 떠올려야 아이디어가 나온다.”



점심은 아침, 저녁과 다르다


“도대체 산수도 못 합니까? 지금 10인치 피자를 16,000원에 팔고있는데, 어떻게 6인치 피자를 6,000원에 팔자는 제안을 합니까?”


피자헛에서 근무할 때 맞닥뜨린 실제 상황이다. 하루는 대표이사가 핏대를 올리며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주중 한정 점심메뉴로 1인용 6인치 피자의 론칭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대표이사는 테이블 단가가 떨어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객 입장에서 6인치짜리 피자 2개를 시키면 12인치 피자가 12,000원. 굳이 16,000원을 내고 10인치 피자를 시킬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점심시간마다 고객을 관찰해왔다.


한국 사회의 점심문화는 단순히 밥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가족과 함께하는 아침, 저녁과 달리 점심은 주로 직장에서 해결한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에는 사적이고 공적인 대화들이 수없이 오간다. 대화가 오가다 보면 메뉴도 오갈 수밖에 없다. 자기가 시킨 메뉴를 권하기도 하고, 상대의 음식을 가져다 먹기도 한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건 일종의‘ 리추얼’이다. 점심시간에 음식을 나눠 먹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동료로서의 유대감을 쌓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일 메뉴보다는 다양한 메뉴가 더 어울린다.

게다가 피자는 나눠 먹는 재미가 큰 음식이다. 실제 피자집에서 피자만 시킨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피자는 기본이고, 샐러드, 스파게티, 리조또 등 가급적 여러 가지 메뉴를 시키는 게 보통이다. 피자는 대형 사이즈를 주로 판매했기 때문에 점심메뉴로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내가 관찰한 일부 고객은 양이 많은 피자 대신 사이드 메뉴인 파스타와 리조또를 주문하기도 했다. 피자 매장에서 피자를 판매하지 못하다니, 얼마나 큰 손해인가. 그래서 과감히 피자의 사이즈와 가격을 줄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피자 가격은 줄었지만 피자와 사이드 메뉴까지 포함하면 테이블 단가는 올라갈 거라고 자신했다. 나는 1인용 피자뿐 아니라 파스타, 리조또 등 7가지의 6,000원 짜리 메뉴를 동시에 제안했다. 셋이 와서 16,000원짜리 2~3인용 피자를 시키지 않고, 1인용 피자, 1인용 파스타, 1인용 리조또 등 다양한 메뉴를 주문하면 오히려 테이블 단가는 18,000원으로 상승 할 거라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대부분의 반대 속에 이 제안은 무산될 뻔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체 비즈니스에 영향 받지 않는 내에서, 즉 지방의 일부 매장에서 그것도 소규모로 한정하여 시도해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20여 개의‘ 피자헛’ 가맹점을 운영하던 최광호 사장에게 달려갔다. 점심을 사먹는 직장인과 학생들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점심시간 방문자 수와 객단가를 올릴 수 있다는 믿음을 피력했다. 평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성향의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서면 지점을 비롯한 일곱 곳의 매장에서‘ 쁘띠런치’라는 브랜드로 시작되었다. 9년이 지난 지금 6인치 피자는 피자헛 매출의 최대 공신이 되었고, 최광호 사장은 한국 피자헛 최다 매장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오너가 됐다. 단 지금은 6인치 피자의 목적이 살짝 변질된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애초부터 주중 점심시간에만 파는, 레스토랑 한정 메뉴였다. 언제 어디서든 6인치 피자를 시킬 수 있다면, 피자헛 피자가 다소 저렴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눠먹는다’는 피자 본연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도 브랜드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씁쓸한 부작용이다.


작가는 민중보다 한발 앞서 가라,

그러나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 있어라.

- 톨스토이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5화 파도가 아닌 바다의 흐름을 읽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