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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석 Apr 24. 2018

언제나 ‘신상’만 팔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것을 본다〉-7화-

폭탄주에 숨겨진 비밀


오비맥주에 입사하고 나서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는데 한 브랜드가 눈에 들어왔다. 2007년에 출시된‘ 카스 레드Cass Red’였다. 카스 레드는 알코올 도수가 너무 낮다는 일부 소비자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만든 6.9도의‘ 고알콜 맥주’다. 하지만 실상은 당시 유행하던 소맥(소주와 맥주의 혼합주)의 유행에 편승해 내놓은 일종의 ‘ 레디메이드 소폭’이다. 4.5도의 맥주 80%와 19도의 소주 20%를 섞으면 대략 6.9도의 소주 맛이 약간 나는 맥주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는 맛과 도수로는 소비자를 만족시켰을지 몰라도, 정작 소비자의 재미를 빼앗은 제품이 되었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6.9도 혼합 주류가 아닌,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리추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바Bar에 가면 제각기 서서 병맥주를 들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작은 사이즈의 맥주가 잘 팔린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럿이 맥주를 나눠 마시는 문화를 선호한다. 각자 알아서 따라 마시면 왠지 각박하다고 여긴다. 500ml의 병맥주가 잘 팔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혼자서 한 번에 마시긴 부담스럽고 둘이서 나눠 마시면 양이 조금 남는 크기 아닌가.


우리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기쁠 땐 맥주를, 슬플 땐 소주를 나눠 마신다. 리추얼은 의미가 부여된 일종의 의식이다. 술자리에는 각양각색의 리추얼이 존재한다. 서로 술을 따라주거나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치는 행동, 병뚜껑을 숟가락이나 라이터로‘ 뻥’ 소리를 내며 따는 것, 모두 리추얼이자 재미다. 폭탄주 역시 리추얼에서 탄생한 문화다. 단순히 취하기 위해서만 섞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만드는 과정부터 우리는 술을 즐기기 시작한다. 어떤 비율로 섞을 것인지, 어떻게 해야 색깔이 예쁘고 적당한지, 술을 얼마나 흔들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잔을 비울 것인지 등 각종 아이디어를 내며 술을‘ 말기’ 시작한다. 탄성과 환호성이 교차하는 그 시간은 자체로 한 편의 쇼가 된다. 이러한 즐거움과 재미를 깡그리 앗아간‘ 기성품 소폭’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카스 레드는 소비자의 인사이트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지금은 최소 생산단위만으로 브랜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수가 높은 맥주를 선호하는 일부 소비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처음 겨냥했던 진정한 타깃은 아닐 것이다. 대신 의외로 몽고와 같은 추운 지방 국가들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고도주를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카스 레드가 최상의 맥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맥주가 애초 체온 보호나 빠른 취기를 위한 것은 아니었기에 한편으론 씁쓸하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카스 제품들이 몽골에서 1등 국민맥주로 판매되고 있으니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축하할 일이다.


식당에 가서 술을 시키면 일명 폭탄주 잔을 가져다준다. 나 역시 경쟁사처럼 폭탄주 잔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었다. 한때 막걸리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후배 직원들이‘OB막걸리’를 만들자며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절대 트렌드를 따라가지 말자. 우리가 시대를 제대로만 읽는다면 트렌드는 따라오기 마련이다.”라며 다독였다. ‘ 우리도’라고 말하는 순간, 무엇이든 뒷북으로 전락한다. 언제나‘ 우리는’으로 가야 한다.



완전히 새로울 필요는 없다


지금의‘ 카스라이트’는 원래 2006년‘ 배부름이 적은 저탄수화물 맥주’인 카스아이스라이트로 시장에 소개됐다. 실은 그 유명한 밀러 맥주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는 일찍이 밀러가 경쟁사 버드와이저에 대항하기 위해 밀러라이트Miller Lite라는 라이트 맥주를 시장에 내놓은 선례가 있다.‘Great Taste, Less Filling’이라는 슬로건으로 예전보다 맛은 향상되고 포만감은 적다는 장점을 내세워 미국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리포지셔닝 케이스다.


그런데 정작 한국 소비자들은 라이트 맥주인 카스아이스라이트에 큰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맥주는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불평하던 이들조차 철저하게 외면했다. 가만 살펴보니 그 역시 심리적인 이유였다. 맛은 있지만 식후 포만감이나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꺼리는 음식들이 있다. 기름진 중국 음식이나 피자 등이 그것이다. 대신 한번 먹겠다고 작정하면 허리띠를 풀러놓고 먹는다. 먹으면서 살찔 걱정을 하기보다 간만에 얻는 포만감에서 정신적 만족을 얻겠다는 심리다. 따라서 배부름이 적은 중국 음식이나 기름기가 적은 피자는 오히려 외면당하기 쉽다. 실제 맛있는데 맛없어 보이는 부작용까지 발생한다. 애초부터 원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맥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머릿속에 맥주는 원래 배부르게 마시는 술이다.


맥주를 마신 후 느끼는 배부름은 맥주가 제공하는 순기능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불편함일 수 있다. 그 부분만 딱 꼬집어서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당당하게 어필해봤자, 맥주를 즐기는 이들의 성에 찰 리 없다. 따라서 굳이‘ 카스아이스라이트’를 반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2010년에 브랜드 명을 ‘ 카스라이트’로 변경하고, ‘ 저탄수화물’ 맥주가 아닌 ‘ 저칼로리’ 맥주로 리포지셔닝했다. 더불어‘ 맛은 올리고 칼로리는 내리고’와‘ 맛있게 즐기고도 라이트’ 등의 슬로건으로 기존 맥주보다 칼로리를 33%나 내린 점을 부각시켰다. 핵심은 맛이 일반 맥주와 비슷하니, 같은 맛이면 이왕 저칼로리 맥주를 즐기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처음 저지방 우유를 봤을 때 굳이 우유까지 칼로리를 따져야 하나 싶었지만, 한번 마셔보고 일반 우유와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은 후부터는 늘 저지방 우유를 마시고 있다. 2010년 의미 있는 리포지셔닝의 결과, ‘카스라이트’는 3년 연속 두 자리 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과거의 아픈 기억을 말끔히 지워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처럼 유행에 민감한 민족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 일부 국가의 국민들도 유행에 민감해 세계적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만큼 고유의 전통도 중시한다. 허나 우리 대한민국은 전통보다는 새로운 문화나 상품에 더 목말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요즘처럼 다양한 상품들이 시시각각 나오는 상황에서는 시류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행을 따라야 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이미지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상품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겉으로 별 차이가 없어 보여도 신상이라는 한마디에 주저 없이 지갑을 여는 수많은 이들을 보라. 그만큼 신상은 매력적이요, 첨단의 유행을 쫓는 한국인에게 끝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신상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구제품을 리폼Reform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포지셔닝은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는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 리포지셔닝조차 한 번 성공했다고 안심하기 이르다.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노출되는 동안은,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화하는 기호와 트렌드를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 보이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상의 이면에 담긴‘ 보이지 않는 부분’마저 읽어내야 또 다른 역할이 생긴다. 어쩌면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일 것이다.


나는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돌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해방시킬

뿐이다.

- 미켈란젤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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