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곱씹어. 내가 소화시킬 것이 없잖아!
나는 언제나 슈퍼컴퓨터였다. 모두가 잠들었을 때에도 끊임없이 회로를 돌려 가장 최선의 답을 찾아내는 컴퓨터말이다.
'내일 PPT 발표 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이 뭐가 있지?'
'거래처는 메일 잘 받았나? 왜 답장이 없지? 확인전화 한번 더 해볼 걸 그랬나?'
'아, 이걸 이렇게 수정했으면 더 완벽했을텐데….'
'토요일날 친구 만나기로 했지. 그 친구랑 어딜 가야 재밌을까….'
이렇게 몇번이고 몇번이고 머리를 굴려서 나온 답은 대부분 결과가 좋았다. 몇번이고 곱씹고 곱씹어서 내린 결정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어느새 사람들에게 나는 모든걸 척척 해결하는 슈퍼컴퓨터로 비춰졌다. 점점 친구들과의 약속이 늘어나고, 모르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들이 생기고, 회사의 중요한 업무들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매사에 완벽하기 위하여 퇴근 하고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항상 현재의 상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지금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때문에 밥알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뚜욱뚝 떨어트리면서, 남의 말은 무엇 하나 허투루 흘려듣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정신소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만, 그때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 그것보단 이 말이 나았을 것같은데…. 다시 가서 말하는게 나으려나?'
'아, 1시간 뒤에 미팅인데 첫마디를 뭐라 하는게 좋지. 그 다음에는 이렇게이렇게하고, 마무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끝내야 이 다음 일을 할텐데. 아, 그게 끝나면 그 다음 일은 또….'
나는 씹으라는 밥은 안 씹고 계속해서 최선의 선택지만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가 되어있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던 즈음의 밤이었다. 평소보다 피곤함이 유독 심하여 얼른 이불을 덮고 잔 그때, 갑자기 위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픔을 주체하지 못 하고 침대를 뒹굴다, 화장실로 기어가 세번을 토했다. 난데없는 고통이었다.
위염이었다. 그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밥은 안 먹고 주스나 커피만 주구장창 마신 탓이었다. 나는 결국 병가를 냈다. 링겔을 맞고 일주일을 내리 기어다니고나서야 살만해졌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죽도 죽이지만, 어느정도 괜찮아지시면 꼭 일반식을 드세요. 사람이 운동 안 하고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약해지듯이, 부드러운 것만 먹으면 위장도 약해지거든요. 너무 무른 것보단 어느정도 딱딱한 것이 좋아요."
아! 그때 알았다. 난 너무 생각을 곱씹고 곱씹은 나머지 마음이 소화시킬 영양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때로는 거친 것이 좋다. 생각도 덜 씹는 것이 좋다.
링겔을 맞으며 누워있는데, 마음 한 켠의 박동소리가 마치 나를 향한 잔소리같았다.
"야, 그만 곱씹어. 내가 소화시킬 것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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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컴퓨터는 오늘부로 포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