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해야 운이 생기더라고
일자리를 잡기까지 여러 우연들이 겹쳐 마침내 두바이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행운이 겹쳐 두바이에 올 수 있었지만 인터뷰와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결국 나의 두바이 생활은 없었다.
두바이에서 일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된 경험은 두바이로 가기 1년 전 남미에서 겪은 일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베네수엘라에서 시도했지만 망한 사업 실패와 이후 쿠바 대신 선택한 페루에서의 경험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초보 장사꾼으로서 시도한 사업은 망했다. 당시엔 개인 역량이 문제라 생각했기에 좀 더 실패를 낮추고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페루의 정글지역, 후닌 주의 작은 도시 사티포(Satipo)로 갔다.
페루 도착 후 원래 목적지는 찬차마요(Chanchamayo) 시였지만, '사티포에는 과일과 커피가 많이 생산된다.'는 론리 플래닛에 적힌 설명 한 줄만 보고 그곳까지 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도착 후 눈에 띈 곳은 커피 조합이라 써진 건물 2층이었다. 정말 생각 없이 무작정 갔다. 아무도 날 초대하지 않았지만 그냥 날 거부할 것 같진 않아서.
희한하기도 하지. 이게 무슨 우연일까? 내가 도착한 날 그 촌 동네에 외국인이 있었다. 한 프랑스 여학생도 때마침 그날 인턴 차 와 있었다. 난 일을 배울 수 있게 부탁했고 어렵지 않게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커피조합에서 몇 달간 일을 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사업을 하기 전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일들을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겪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정말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수도인 리마에서 차로 12시간 가까이 걸리는 사티포, 이곳에서 다시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안데스 산맥 구석구석의 커피 농장을 다녔다. 사티포 시내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프랑스 사람과 한국 사람이 그 시골에 나타났으니, 외지로 나갈 일이 없는 커피 농부들은 우리가 얼마나 신기했을까?
이방인이라는 신분 덕분에 지역 행사를 직접 진행해 보기도 하고, 제품을 만들어 지역 마켓에 물건을 팔아보면서 짜릿함을 느꼈다. 커피 수확 시즌이 오면서 일은 바빴고 주말엔 농장 방문으로 잘 쉬지도 못했다. 감사한 사실은 당시엔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을 경험하는 일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 일들이 이후 두바이에서 일자리를 잡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커피나무조차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두바이에서, 현업에 있는 친구들은 나의 경험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많은 질문을 했다. 아랍 에미리트는 국교가 이슬람교라 술을 금기시한다. 대신 그들은 차와 커피를 소비한다. 사람 간의 사회적 간격(생활하기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간의 거리)이 우리보다 더 가까운 그들과 커피를 매개로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여행 중인 사람이자 커피 마니아인 내게 신선한 에너지를 줬고, 호기심도 채워줬다.
두바이에서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일하던 당시 아랍 에미리트 부통령이자 두바이의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를 직접 본 일이다.
뉴스에서나 보던 왕이 정말 내 눈앞에 딱! 신기해서 몇 초간 정지상태로 보다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대접할 커피 한잔을 내렸다. 바로 앞을 지나며 눈을 마주쳤기에 난 목례로 인사까지 했는데 아쉽게도 주변 보디가드의 경계 및 셰이크 왕과의 거리 때문에 커피는 직접 건네지 못했다.
이 날은 조용히 흘러갔지만 시간이 지난 후 커피를 뽑다가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왕을 만난 그날의 기억 덕분에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달리 보였다. 내가 하는 일이 21세기 현존하는 왕에게 대접할 수 있는 커피와 같은 가치를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달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단지 커피 하나로 너무 과장한다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은 없다.
왕을 만났을 때 좀 더 빨리 센스 있게 대접할 수 있었으면 훨씬 특별하고도 멋진 경험이 되었겠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괜찮았다. 내가 이 날 이 자리에 없었다면 왕을 볼 기회도 없었을 테고 그에게 커피를 건넬 생각조차 해보지도 못했을 테니. 무엇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달리 볼 생각조차 못했을 거니까.
두바이까지 오게 많든 수많은 우연의 조합을 떠올렸다. 우연의 요소를 더해 두바이로 의지를 발휘해 오지 않았다면 두바이에서의 순간이 과거의 경험들을 꿸 수 있었을까?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이렇게까지 달리 볼 수 있었을까? 두바이에서의 시간은 내가 베네수엘라에서 사업 실패 당시 호텔방에서 느낀 답답함과 무력감에 울었던 그 경험이 보상받았다고 느꼈을 정도로 반전의 시간이었다.
두바이에서 보낸 시간은 좋은 기회였던지라 진지하게 세계일주를 관두고 정착을 고민하기까지 했었던 두바이 생활이었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두바이에서의 생활 덕분에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믿고 이곳을 떠나 옆 나라 오만으로 갔다.
두바이 생활을 되돌아보며 느낀 것은 우리의 삶에서 내가 심은 과거의 씨앗이 언제 의미 있는 열매로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앞의 모든 일이 벌어지는데 가장 먼저 베네수엘라에서 망한 경험이 없었다면 페루의 경험이 있었을까? 그리고 두바이까지 연결이 되었을까?
결과론적인 이야기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에도 오랜 시간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다를지 몰라도 삶엔 여러 모양의 좋든 나쁘든 '운'이라는 요소가 분명 존재하며 그것은 끊임없는 행동과 시도, 꾸준함에 더해진 농익은 시간이 완성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모든 조합이 필요할 수도 있다.
너무 싫었다면 다시는 커피를 쳐다보지 않았을 텐데 지속적으로 해 온 커피 공부가 여러 운을 만들어 준 걸까? 과정은 너저분했을지 몰라도 두바이로 오기 전의 여러 경험들은 색다른 기억을 만들고 싶었던 소망을 멋지게 이뤄줬다. 이 경험을 보니 단순한 결과로 남았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일에는 좋고 나쁜 양면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목표를 잡고 가는 중에 상황이 당장 힘들더라도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운이 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다는 자세로. 지금은 겨우 농경시대처럼 콩이나 팥을 심어 그 결과만을 보는 1차적인 시대가 아니다. 경험과 시간이 버무려져 어떤 결과로 나올지 모르는 미래가 있다. 물론 가라앉는 배에서 먼저 뛰쳐나올 감각도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부분이었고 나도 정의 내리기 힘든 영역을 경험에만 의존해 말하려니 어렵지만 우리 삶에 운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경험 속 최소한의 행동 그리고 하지 않은 행동을 포함하는 운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살아나 각자의 인생을 만든다. 이 여행이 아니었으면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는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이 여행이 삶에 대해 필요한 태도 하나를 가르쳐줬다.
*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달 후 두바이 친구들로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연락이 왔다. 무려 4년 가까이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터였는데. 또 다른 운이 찾아왔지만 다른 운을 기다리며 새로운 씨앗을 심어 보기로 하고 거절했다. 거절을 잘한 듯싶다. 큰 준비를 하고 가야했을 그곳에도 코로나가 올 줄 알았을까? 그 덕에 작은 운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