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 너구리 내놔!!!
라이딩을 하다 보면 야생동물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었다. 야생동물 덕분에 벌어진 일로 황당과 당황, 짜증과 웃음이 동시에 밀려난 기억, 그것은 지나고 나서야 웃을 수 있는 이 여행이 내게 준 선물 같은 기억이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시작한 아메리카 대륙 종단은 1달 반 정도 되어갈 무렵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라이딩 중 림과 맞닿은 타이어 일부가 찢어졌고 공기압에 의해 그 찢어진 틈 사이로 튜브가 마치 김밥 옆구리 터지듯 튀어나왔다. 이윽고 펑크가 났다. 응급처치를 했음에도 터져버려서 바퀴조차 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난감함에 머리를 싸매도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찌한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종이 박스를 구해 'Please Bring me to bicycle shop.'라고 큼지막하게 썼다. 자전거에 짐이 많아서 보통의 속도로 가다간 타이어와 튜브, 바퀴 전체가 망가질 터였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만은 있을 수는 없어서 아주 살금살금 이동하고 있었다. 그 박스에 써놓은 글을 자전거 뒤에 걸어 놓은 채로.
2시간을 자전거를 끌며 이동했다. 지나가던 현지인이 캘리포니아에서는 히치하이킹이 불법이라는 말을 알려줬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픽업트럭에 내 짐을 싣고 난 다음 자기가 지나간다는 동네인 포인트 아레나(Point Arena)에 날 데려다줬다. 무사히 도착했지만 그 동네에는 자전거 가게가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아저씨가 날 보고선 자기가 안 쓴다는 중고 타이어를 줬고 나는 고쳐 끼웠다. 타이어 문제로 종일 내내 진이 빠진 상황. 잠을 자러 캠핑장으로 가야 했다. 해가 이미 저물었던 데다 목적지까진 1시간을 넘게 달려야 할 거리였다. 감사하게도 또 다른 현지인 데이비드 아저씨의 도움으로 캠핑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길었던 하루였다.
도착한 캠핑장은 조명 하나 없이 암흑만이 가득했다. 구름과 나무로 가려진 하늘은 달빛조차 보이지 않아 시커멓기만 했고 비까지 내린 후여서 캠핑장 분위기는 음습했다. 강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텐트와 자전거에 툭툭 떨어지는 낙엽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지만 배는 또 정말 고팠던지. 저녁 식사를 위해 물을 끓이면서 잠자리를 위해 텐트를 치고 있었다. 빨리 배를 채우고 먹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눕고만 싶었다. 캠핑장으로 데려다준 데이비드 아저씨의 자동차 라이트에 의지해 텐트를 치고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어두움 사이로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 나뿐만 아니라 캠핑장까지 날 데려다준 데이비드 아저씨도 함께 들었던지라 생생하게 들려온 그 소리에 순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응?'
멈춰서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며 자전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재차 들려오는 소리가 크고 길게 이어졌다.
'사람 소리도 안 들리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자전거 라이트를 어둠 속에 보이지 않던 테이블을 향해 비춰보니 깜짝 놀랄만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 내 음식 가방을 헤집고 있던 너구리들!!! 나는 그 상황에 놀라 너구리들을 라이트로 비추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너구리도 순간 행동을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뭐야!?!?!?!?"
나와 데이비드 아저씨도 너무 놀라 너구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 간의 정적. 내가 쫓아버리려는 행동을 취하니 너구리 한 마리가 가방 안에 꺼내 쥐고 있던 봉지를 입에 물고선 잡기도 힘든 속도로 나무 덤불이 있는 숲 속으로 뛰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다시 살폈다. 음식 가방을 보았는데 당황과 황당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 너구리가 훔쳐간 것은 바로, 우리나라 너구리 라면이었다.
"아놔, 저거 사려면 한국인 슈퍼마켓에 가야 되는데..."
미국 동물도 K-food를 참 좋아하는구먼. 너구리가 너구리를 훔쳐가다니. 라면을 빼앗겨서 짜증이 나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거짓말 같아 웃음이 터졌다.
식사를 마친 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영화 한 편을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텐트 밖에서 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마치 페트병 안에 돌을 넣고 흔드는 소리 같은.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었다. 텐트 주위로 야생 동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밖에서 아까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고 텐트 문을 비춰보니 잠가놓은 텐트 지퍼가 열려있다!??!
'이거 무슨 일이지?!?!'
괴상한 기분과 함께 텐트 지퍼를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헛웃음과 함께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아까 쫓아낸 그 너구리 가족이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텐트에 몰래 들어와 멀티 비타민 통만 쏙 빼냈고, 그걸 열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나와 너구리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잠시 몇 초간의 정적. 배가 고팠나? 마치 '이것만 먹으면 안 돼요?' 하는 듯한 그 애잔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너구리는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던지 사람도 신경 써서 열어야 하는 어려운 비타민 병을 따 비타민을 바닥에 와락 쏟았다. 너구리가 너무 먹고 싶어 하는 눈빛이 있었지만, 참아줄 순 없었다.
겨우 쫓아내고 나니 경고문이 붙어있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경고를 보면서 갖고 있던 모든 음식물을 박스 안에 넣었다. 잠이 깨서 짜증이 밀려왔지만 경험한 일을 생각해보자니 믿기지 않아서 다시 한번 헛웃음이 터졌다.
우리 조상님들은 너구리가 원래 이런 동물인걸 아셨을까? 동물 이름 참 잘 지으셨다. 황당과 당황, 짜증과 웃음을 너구리 덕분에 한 번에 경험했던 날. 좀처럼 겪기 어려운 너구리가 만들어준 기억 덕분에 아직도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