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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팔트 고구마 Jul 29. 2021

운과 우연

무딘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우연

 내가 겪은 자전거 여행은 이전에 경험했던 일반적인 배낭여행보다 돌발적인 사건의 발생 빈도가 높았다.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당하다 보니 종종 주변으로부터 '액땜'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행에 땜질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액(厄)이란 좋지 않은 운수를 말한다. 하지만 난 모든 일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반대편의 행운도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걸 움직이게 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고민을 한들 모호한 개념이었기에 생각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무딘 나임에도 단발성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며 조금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느낀 '운(運)'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것은 열사의 땅, 아랍 에미리트에서 경험했다. 






 첫 유럽여행을 마친 뒤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로 갔다. 물가 높은 유럽에서 몇 년 더 여행을 지속하고 싶었고 필요한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서였다. 두바이에 오기 전 커피 관련한 일자리 조사에 나섰다. 현지에 있는 몇몇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현재 상황과 내가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이 어느 정도 되는지 어떤지도 대략 들었다.


 세계 유명 호텔 바에서 일하고 싶었다.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기에 두바이 도착 후 미리 점찍어둔 곳으로 가서 직접 이곳저곳을 살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직접 살펴본 세계 유명 호텔의 그곳들은 우리나라 동네 카페 수준만 못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7성급 호텔이라는 버즈 알 아랍 호텔도 기대 이하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팜 주메이라 호텔 외 유명 호텔 몇 군데를 들러 내 눈으로 확인했지만 생각보다 수준 이하여서 아랍에미리트로 오기 전의 계획을 바꾸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국 여행이나 하자 싶어 아랍 에미리트 옆에 붙어있는 나라, 오만으로 떠나기로 했다. 






우연의 시작이었던 그 카페


 두바이를 떠나기 전 우연히 한 카페를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믿기지 않는 우연이 시작되었다. 어지간해서 만나기 힘든 멕시코 사람이 그곳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대화가 시작된 것도 내가 우연히 멕시코 국가대표 축구팀 유니폼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짧은 대화 중 그녀는 다음 주에 두바이에서 큰 이벤트가 있다며 알려줬다. 걸프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이 대부분 참여하는 큰 행사이기에 한번 찾아보라는 말을 전해줬다.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는 공고를 발견했고 온라인 지원을 한 뒤 잊은 채 곧장 오만 방향으로 여행을 떠났다.




두바이를 떠나 푸자이라로 가는 길, 사막왕국 아랍에미리트


 3일째 되는 날 오만 국경에 인접한 아랍에미리트의 7개 연맹 토후국의 하나인 푸자이라(Fujairah)에 도착했다. 난 당시 심카드도 없던 때라 인터넷 사용이 불가했는데 공용 와이파이도 찾기 어려운 아랍 에미리트의 길에서 우연히 와이파이를 잡았고 그 덕분에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원한 회사로부터 온 면접 소식이었다. 전화를 달라는 말에 우연히 길을 지나던 사람에게 전화를 빌려 지원 회사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회사는 나의 사정을 듣고 다음 날이 아닌 이틀 후로 면접날을 잡아줬다. 면접을 잡아 놓았으니 두바이로 빨리 돌아가야 했다. 푸자이라에서 두바이까지 내 짐과 자전거로 3일이 걸렸다. 야간 라이딩을 강행해서 하루 반 만에 달려보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또 다른 우연이 내 라이딩을 가로막았다.


 아랍 에미리트는 사막을 가진 비가 잘 내리지 않는 나라다. 비가 거의 없는 아랍에미리트의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떠나려는 그날 그리고 그때, 길에선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비옷을 꺼내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속옷까지 싹 젖을 정도의 물폭탄이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도 비는 한동안 쏟아졌고 그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나저나 큰일인데, 계속 달려야 하나? 지금 달려도 시간이 부족한데...'


 노면 상태가 비로 미끄러웠던 데다 야간 라이딩까지 생각했던 내겐 늦은 시간까지 달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길에 서서 고민하다 결국 푸자이라 시내로 돌아왔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마지막 남은 건 버스 이동이었다.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될지는 몰랐다. 왜냐하면 아랍 에미리트의 공공 버스에 자전거를 실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다. 하지만 내겐 다른 대안이 없어서 버스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우연이지만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비가 퍼붓고 난 후 푸자이라 시내 도로. 조금은 물이 빠진 상황이었다.


 원래 비가 잘 오지 않는 아랍 에미리트에 배수 시스템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부다비나 두바이 같은 마천루형 빌딩이 있는 국제 도시가 아닌 푸자이라는 더욱 그랬다. 비의 영향으로 침수된 도로의 차들은 느렸고, 제시간에 와야 할 버스는 원래 시간보다 한참 늦어 그다음 버스 배차 시간을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 버스는 다음 버스 시간의 승객까지 모두 태운채 떠났고 자전거와 함께 탈 수 없었던 나 혼자만 타지 못했다. 


 '망했다. 이거 면접 못 보겠구먼. 그냥 오만으로 가야 하나?'


 낙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은 끝나지 않았다. 밀렸던 배차시간 때문에 한대 남은 버스가 혹시나 운행할까 싶어 기다렸다. 그런데, 그 버스가 왔다! 원래 시간보다 한참 늦은 텅 빈 채로!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았던 때, 나 혼자 버스 타기!


 거짓말같이 승객은 나, 단 한 명이었고 자전거와 함께 두바이로 무사히 도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바이 도착 후 다음 날 면접과 테스트 후 합격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조합이 있다. 


 멕시코 사람을 중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확률은?

 그 사람이 내게 말을 걸도록 그날 내가 멕시코 축구팀 티셔츠를 입을 확률은?

 그 사람이 내게 호의를 품고 그 이벤트를 알려줄 확률은?

 당시 푸자이라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은? 

 공중전화 없던 그곳에 마침 지나가던 외국인 노동자에게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확률은? 

 회사가 나 1명의 편의를 고려해 면접 날짜를 미뤄줄 확률은?

 비가 거의 안 내리는 아랍 에미리트에 도로가 잠길 정도로 폭우가 내릴 확률은?

 그 폭우로 버스가 밀리고 승객이 단 한 명도 타지 않고 나와 자전거가 탈 수 있는 확률은?

 수십 명의 지원자 중 내가 합격할 확률은?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순서상 잘 조합되어 내게 일어날 확률은? 



합격 후 일을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직접 겪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해봐도 거짓말 같다.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지 않을까? 내가 운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 이유도 이러한 일들을 여행 중 여러 번 경험하고 나서다. 무딘 사람이라도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한 번쯤 '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까? 내가 겪은 모든 우연과 상황이 나를 어떻게든 이 곳, 두바이에서 잠시라도 지내게 하려는 계획처럼 느껴졌다.




아이고 실례합니다. 두바이 7성급 호텔 앞에 위치한 나만의 7성급 텐트


 사람이 하는 일의 성패는 하늘, 땅, 사람 3가지에 달려있다고 한다는데 난 그 깊이나 심오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나를 어딘가로 이끌고 있는 그 강력하고도 가공할만한 힘이 있다는 걸 알았고 덕분에 요즘 말로 될놈될이란 말의 뜻을 체감할 수 있었다. 


 경험한 이 운은 정말 가공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사람이 선택을 할 때 좋은걸 선택하려 하지 나쁜 걸 선택하진 않는다. 자연스레 나의 선택 방향도 오만으로 당장 여행이 아닌 두바이 생활로 정해져 있었다. 이 과정은 내가 남은 여행 동안 운과 행동에 대해 탐닉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이후 두바이에서의 경험은 후에 또 다른 만남과 여정으로 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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