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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Jul 20. 2021

죽음의 목격자

그 해 여름, 능소화





  계절이 떠오르는 꽃이 있다. 내리쬐는 햇볕이 아프게 느껴지는 날씨면 시선은 절로 벽을 향한다.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면 유독 예쁘게 피어나는 꽃이 있기 때문이다. 벽에 초록 이불을 펴고 나면 그 위로 빛을 닮은 꽃이 송송 솟아난다. 뙤약볕을 삼키고 뜨거운 빛에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딘, 주홍색 꽃. 다 커서야 이름을 알게 된 능소화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어린 걸음으로 20분 남짓 걸렸다. 아침에는 아빠의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금세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처럼 어린 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20분보다 더 걸린 적이 많았다. 그중에 최고의 헛짓거리는 군것질이었다. 엄마를 졸라 천 원 이천 원 받아 친한 친구와 함께 분식집에 가곤 했다. 낡은 접시 위해 넙덕한 큰 숟가락으로 턱턱 얹어 이쑤시개로 쿡 집어 먹던 떡볶이. 그거 하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분식집은 허름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챠르르 열리는 미닫이 문과 모가지가 곧 떨어질 것 같이 휘청이는 파란 날개 선풍기, 후덥지근한 공기 안에 뒤섞인 맛있는 냄새. 분식집 이름이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식’이라는 글자 위에 띄엄띄엄 떨어진 분식집의 이름은 흔한 누구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에는 커다란 담이 있었고, 여름만 되면 그 담은 초록과 주홍으로 어우러지게 변했다. 화사한 주홍 꽃이 이파리를 활짝 펼치면 그 주변을 벌이 맴돌곤 했다. 더 어렸을 때, 벌에게 손가락을 물려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기에 나는 벌을 피해 괜히 빙 돌아 걷곤 했었다.


  날이 더 더워질수록 주홍 꽃의 빛은 더 고와졌다. 빛을 먹고 자란 꽃은 그 이파리가 풍성하고 기분 좋은 향긋함을 뿜어내곤 했다. 꽃의 수가 늘어날수록 꽃을 찾는 벌과 나비, 벌레도 많아졌다. 남자 애들은 그 꽃 주변에 몰려들어 놀았다. 꽃 주변에서 뭐 하고 노느냐는 물음에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저들의 놀이를 설명해줬다.



  “벌 잡아.”

  “벌?”

  “꽃 안에 꿀 따러 들어가면 잎을 모아서 낚아채면 돼. 벌이 도망가기 전에 얼른 쥐면 벌을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벌은 왜 잡냐고 묻기도 전에 그 애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꽃 안에 갇힌 벌은 예기치 못한 인간의 공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앵앵댔다. 벌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귀를 후벼 팠다. 그냥 놔주라는 말에 그러면 벌이 복수하러 온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꽃을 힘껏 흔들고 바닥에 내리쳤다. 늘어진 꽃잎 위로 인간의 잔인한 발이 힘껏 내디뎌졌다.


  꽃도, 벌도 죽어버린  순간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벌은 죽어야 했고, 꽃은 짓밟혀야 했을까.  이불을 덮고 짓이겨진 벌을 보며 웃는 남자애들을 보며 처음으로 의도적인 악의가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꽃의 이름이 능소화라는 것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내게 능소화는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다.  잔상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적인 기억이다. 눈앞에서 죽어버린 불쌍한 벌, 잔혹함에 찌그러진 시체 위를 덮어주던 햇빛을 닮은 꽃.  애들은 재미로 벌을 죽이고 꽃을 죽였다.  계절이 되면 떠오르는 슬픈 기억이다.


  출근할  능소화를   있는 길이 있다. 공사장 건너편, 위험한 찻길 옆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 빛을 마음껏 삼켜야 예쁘게   있는데 묘하게 드러진 그늘 때문에 다른 곳에  꽃보다 색이  곱다. 능소화 근처를 맴도는  한 마리 보이지 않는데, 꽃을 보면 괜히 울렁거린다.  여름날,  벌,  능소화는 이유도 모른 채 죽었는데.


  따가울 정도로 아픈 볕,  아래 피어난 능소화가  계절을 무사히 보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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