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능소화
계절이 떠오르는 꽃이 있다. 내리쬐는 햇볕이 아프게 느껴지는 날씨면 시선은 절로 벽을 향한다.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면 유독 예쁘게 피어나는 꽃이 있기 때문이다. 벽에 초록 이불을 펴고 나면 그 위로 빛을 닮은 꽃이 송송 솟아난다. 뙤약볕을 삼키고 뜨거운 빛에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딘, 주홍색 꽃. 다 커서야 이름을 알게 된 능소화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어린 걸음으로 20분 남짓 걸렸다. 아침에는 아빠의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금세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처럼 어린 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20분보다 더 걸린 적이 많았다. 그중에 최고의 헛짓거리는 군것질이었다. 엄마를 졸라 천 원 이천 원 받아 친한 친구와 함께 분식집에 가곤 했다. 낡은 접시 위해 넙덕한 큰 숟가락으로 턱턱 얹어 이쑤시개로 쿡 집어 먹던 떡볶이. 그거 하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분식집은 허름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챠르르 열리는 미닫이 문과 모가지가 곧 떨어질 것 같이 휘청이는 파란 날개 선풍기, 후덥지근한 공기 안에 뒤섞인 맛있는 냄새. 분식집 이름이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식’이라는 글자 위에 띄엄띄엄 떨어진 분식집의 이름은 흔한 누구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에는 커다란 담이 있었고, 여름만 되면 그 담은 초록과 주홍으로 어우러지게 변했다. 화사한 주홍 꽃이 이파리를 활짝 펼치면 그 주변을 벌이 맴돌곤 했다. 더 어렸을 때, 벌에게 손가락을 물려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기에 나는 벌을 피해 괜히 빙 돌아 걷곤 했었다.
날이 더 더워질수록 주홍 꽃의 빛은 더 고와졌다. 빛을 먹고 자란 꽃은 그 이파리가 풍성하고 기분 좋은 향긋함을 뿜어내곤 했다. 꽃의 수가 늘어날수록 꽃을 찾는 벌과 나비, 벌레도 많아졌다. 남자 애들은 그 꽃 주변에 몰려들어 놀았다. 꽃 주변에서 뭐 하고 노느냐는 물음에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저들의 놀이를 설명해줬다.
“벌 잡아.”
“벌?”
“꽃 안에 꿀 따러 들어가면 잎을 모아서 낚아채면 돼. 벌이 도망가기 전에 얼른 쥐면 벌을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벌은 왜 잡냐고 묻기도 전에 그 애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꽃 안에 갇힌 벌은 예기치 못한 인간의 공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앵앵댔다. 벌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귀를 후벼 팠다. 그냥 놔주라는 말에 그러면 벌이 복수하러 온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꽃을 힘껏 흔들고 바닥에 내리쳤다. 늘어진 꽃잎 위로 인간의 잔인한 발이 힘껏 내디뎌졌다.
꽃도, 벌도 죽어버린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왜 저 벌은 죽어야 했고, 꽃은 짓밟혀야 했을까. 꽃 이불을 덮고 짓이겨진 벌을 보며 웃는 남자애들을 보며 처음으로 의도적인 악의가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꽃의 이름이 능소화라는 것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내게 능소화는 그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다. 그 잔상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적인 기억이다. 눈앞에서 죽어버린 불쌍한 벌, 잔혹함에 찌그러진 시체 위를 덮어주던 햇빛을 닮은 꽃. 그 애들은 재미로 벌을 죽이고 꽃을 죽였다. 이 계절이 되면 떠오르는 슬픈 기억이다.
출근할 때 능소화를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공사장 건너편, 위험한 찻길 옆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 빛을 마음껏 삼켜야 예쁘게 필 수 있는데 묘하게 드러진 그늘 때문에 다른 곳에 핀 꽃보다 색이 덜 곱다. 능소화 근처를 맴도는 벌 한 마리 보이지 않는데, 꽃을 보면 괜히 울렁거린다. 그 여름날, 그 벌, 그 능소화는 이유도 모른 채 죽었는데.
따가울 정도로 아픈 볕, 그 아래 피어난 능소화가 이 계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