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윤초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늦기 전에 닿고 싶은 마음들에 관하여

by Minseung Kang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 어느 계절 어느 시점쯤 그 끝이 올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사람은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하게 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 하나, 입버릇 하나, 컵을 쥐는 손가락 모양 하나도 허투루 보지 못할 것이다. 병원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 약봉지의 구겨진 모서리, 저녁 식탁에 남겨진 반찬 냄새 같은 것도 오래 기억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 정말 예지 같은 능력까지 필요해야 하는가. 어차피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미리 아는 일이 대체 무슨 위로가 될까. 결말을 알고 극장에 들어가는 일과, 결말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꿀 수 없는 채 살아가는 일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감상이 아니라 선고에 가깝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모르는 것은 날짜와 방식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을 망치는 습관을 끊고, 먹는 것을 줄이고, 건강검진 알림 문자를 지우지 못하고, 새벽에도 운동화를 묶는다. 오래 살고 싶어서라기보다, 너무 허무하게 끝나고 싶지 않아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 자체보다도 그 직전에 남겨질 문장들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안녕이라는 말도 못 하고 끝나는 일, 미안하다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끝내 나오지 못하는 일,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순간을 지나쳐버리는 일. 인간은 그것을 막아보려고 사소한 노력을 반복한다. 별것 아닌 습관 교정, 별것 아닌 식단 조절, 별것 아닌 안부 전화. 그러나 삶은 대개 그런 별것 아닌 것들로 겨우 이어진다. 무지는 잔인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마지막 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지가 우리를 살게 하면서, 또 후회하게 만든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을 버티지만, 미래를 몰랐기 때문에 놓쳐버린 것들이 나중에는 후회로 돌아온다. 그럴 때면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정말 블랙홀 같은 것이 있어서 시간이 어딘가에서 접혀 있고, 미래의 내가 책장 하나를 흔들거나 벽시계 초침을 밀어 지금의 나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오늘은 가지 마라. 그 말은 하지 마라. 그 사람을 그냥 보내지 마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책은 가만히 있고, 컵은 쓰러지지 않고, 휴대전화 화면은 조용하고, 나는 같은 실수를 조금 다른 모양으로 반복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이 오래 붙드는 것도 결국 그 침묵이다.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늘 뒤틀리고 분기되고 압축되지만,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인셉션》에서도, 《인터스텔라》에서도 시간은 다르게 흐를 수 있을 뿐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을 거스르는 이야기들이 불러오는 쾌감은 늘 있지만, 그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대가가 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케이지는 더 나은 하루 하나를 얻기 위해 같은 하루를 수도 없이 살아야 하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대신 그 시간 바깥에 남겨질 감정을 감당해야 하며, 《어바웃 타임》의 팀은 어떤 사랑을 지키는 대신 어떤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시간을 건드리는 순간 인간은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다. 시간은 한 번도 인간에게 공짜를 준 적이 없다.


그래서 《인터스텔라》를 떠올리면 내게 먼저 남는 것은 우주가 아니라 방 하나다. 먼지가 떠다니는 아이 방, 책장 틈,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간격. 사람들은 이 영화를 말할 때 웜홀과 블랙홀, 상대성 이론과 중력을 먼저 꺼내지만, 정작 오래 남는 것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 닫히는 문, 쌓여가는 비디오 메시지, 너무 늦게 도착한 인사, 다 자란 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의 표정. 이 영화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우주의 구조가 아니라 늦게 도착하는 사랑의 구조다.


쿠퍼와 머피는 서로를 사랑한다.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 사랑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누군가는 남아야 하고, 신호는 보내지지만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상대는 다른 시간 위에 올라서 있다. 여기서 비극은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지 않는다. 사랑은 충분한데, 시간이 엇갈린다. 사랑은 있는데 타이밍이 없다. 그래서 《인터스텔라》의 가장 큰 장벽은 거리보다 시간이다. 너무 멀어서라기보다 너무 어긋나서 닿지 못하는 것. 같은 문장을 보내도 상대는 전혀 다른 계절에서 받아들이는 것. 우주적 거리는 결국 인간적 거리의 번역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물리적 거리보다 시간의 거리다. 같은 도시, 같은 집, 심지어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각자의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사람은 금세 타인이 된다. 나는 아직 화가 나 있는데 너는 이미 지쳐 있고, 나는 이제 겨우 말할 준비가 됐는데 너는 더는 들을 마음이 없다. 사랑은 큰 배신보다 이런 엇갈림 속에서 먼저 닳는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로가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차는 꼭 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그 시차를 견디는 일이 곧 그리움의 실체일 때가 많다.


그래서 영화 속 아멜리아는 끝까지 외롭다.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 계속 가고 있기 때문에 외롭다. 사랑은 멈춰 있는 감정이 아니라 움직이는 감정이라서, 사람은 누군가를 향해 갈 때 자기 고독을 더 또렷하게 본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몸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 움직임이 곧바로 도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사람은 간다. 그를 사랑해서이기도 하고, 그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까지 버리면 정말 끝이라는 것을 알아서이기도 하다. 아멜리아가 끝내 애드먼즈를 향해 가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기 자신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서다.


반대로 머피의 자리에서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어린아이에게 인류의 미래, 종의 연속, 대의를 위한 희생 같은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지금 아버지가 나를 두고 떠나는가 아닌가. 그러므로 쿠퍼의 선택은 숭고하면서 동시에 잔인하다. 세상은 이런 선택을 영웅 서사로 포장하는 데 익숙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는 업적보다 빈자리가 먼저 남는다. 식탁의 빈 의자, 오래 걸려 있는 외투, 열리지 않는 문,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래서 《인터스텔라》는 인류의 생존을 구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를 제때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더 진실해지는 것은 누구도 완전한 영웅이나 완전한 악인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만 박사는 특히 그렇다. 그는 고독이 인간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와 나의 시간이 다시 맞아떨어질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형벌이다. 극한의 고독 속에서 인간은 대개 숭고해지지 않는다. 먼저 초라해지고, 비겁해지고, 추해진다. 그래서 만 박사의 비열함조차 완전히 타자화하기 어렵다. 타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우리는 그것을 잃어본 뒤에야 안다.


이 지점에서 《Song One》은 완전히 다른 규모로 비슷한 문제를 건드린다. 여기에는 우주도 없고 블랙홀도 없고 인류의 미래도 없다. 대신 혼수상태에 빠진 동생과, 그의 삶을 뒤늦게 따라가보는 누나가 있다. 프래니는 살아 있을 때 동생의 음악을 낭비라고 판단했다. 안정된 진로 대신 음악을 택한 삶을 쉽게 실패의 예감으로 읽었다. 그러나 동생이 쓰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듣고, 그가 걷던 동선을 따라가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너무 늦게 도착한 이해는 대개 이런 모양이다. 그것은 깨달음이라기보다 속죄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혼수상태는 특히 잔인한 유예다. 완전한 이별은 아니지만, 마음을 전했다고 해서 응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직 말할 수는 있는 상태. 아직 미안하다고 해볼 수는 있는 상태. 인간이 바라는 가장 작은 기적은 어쩌면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의 귀환이 아니라,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은 관계에 단 몇 분이라도 더 말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 세상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닫혀버린 관계가 너무 많다. 장례식장 복도에서, 영정사진 앞에서, 조문객이 하나둘 빠져나간 뒤의 적막 속에서, 사람들은 그제야 제 문장을 가진다. 그러나 대개 그 문장은 너무 늦다.


프래니가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를 어른이 된 뒤 다시 부르지 못하는 장면도 같은 뜻으로 아프다. 어떤 노래는 멜로디보다 시간이 먼저 들린다. 식탁 위의 접시, 부엌 불빛, 저녁 뉴스 소리, 아무 일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집 안의 공기. “그 노래를 부르던 너는 참 예뻤다”는 어머니의 과거형 앞에서, 현재의 프래니는 현재형의 얼굴로 그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없어진다. 그것은 단지 노래를 잊어버려서가 아니다. 그 노래를 부르던 자기 자신으로도, 그 노래를 듣고 있던 가족의 시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가족은 종종 다시 모인다. 하지만 그 재결집이 병상이나 사고, 장례의 문턱 앞에서만 가능해질 때, 사람은 관계의 쇠락이 시간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시간에 대해 자꾸 아주 작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새벽 2시 14분에 찍힌 부재중 전화, 읽고도 답하지 못한 메시지, 병원 대기실의 벽시계, 장례식장 복도 끝 자판기 불빛,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 문 같은 것들. 시간은 철학이기 전에 그런 식으로 몸에 남는다. 윤초라는 말이 유독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그래서다. 겨우 1초. 그런데 그 1초 때문에 어떤 우주선은 조금 더 날아간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천문학보다 인간관계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사람 사이에도 그런 1초가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전화할 수 있었던 1초, 돌아서는 등을 붙잡을 수 있었던 1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1초, 사랑한다고 너무 늦지 않게 말할 수 있었던 1초.


그러니 우리 삶에도 그런 윤초가 있었으면 싶다. 단 몇 초라도 좋으니, 끝난 줄 알았던 관계를 한 번 더 들여다볼 시간. 떠난 사람에게 안녕을 건넬 시간. 너무 늦었다고 믿었던 말 하나를 겨우 입 밖으로 내보낼 시간. 너와 나 사이에 3년이든 5년이든, 아니 그보다 더 긴 세월이 놓여 있다 해도 그런 유예가 한 번쯤 허락된다면 나는 그 시간 안에서 기어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 마음의 거리는 이미 16만 킬로미터보다 더 멀어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네 옆이어야 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고. 이승이 아니라면 저승에서라도, 결국 그 말의 도착지를 상상하게 된다고.


하지만 시간이 저절로 화해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시간은 상처를 무디게 할 수는 있어도, 이해를 자동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오래 지나도 여전히 밉고, 어떤 이름은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여전히 목에 걸린다. 그럼에도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다르게 읽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신처럼만 보였던 것이 사실은 공포였을 수 있고, 무관심처럼만 보였던 것이 서투름이었을 수 있다는 식의 뒤늦은 해석. 그것은 관계의 복원이 아니라 시선의 변화다. 다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 때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덜 미워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영화들은 용서와 화해를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공유한 시간의 결과로 보여준다. 한때 서로에게 상처였던 존재들이 각자의 생을 조금 더 살아낸 뒤,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 하지만 그조차 자동은 아니다. 시간이 강의 폭을 저절로 좁혀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함께 보낸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다시 읽어보려는 노력이다. 어떤 관계는 그 노력이 가능해지면서 구원에 가까운 것을 얻지만, 어떤 관계는 오히려 거리를 유지할 때만 겨우 생존할 수 있다. 태양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도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가까움이 선한 것은 아니다. 모든 재회가 구원도 아니다. 어떤 관계는 멀어야만 유지된다. 그러므로 화해란 다시 붙어 사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 거리와 온도를 겨우 찾아내는 일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인간이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독하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우주는 너무 크고 시간은 너무 빠르며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인류가 먼 행성을 상상하는 이유도 결국은 여기에 있다. 이 광막한 세계 속에서 지구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 하듯, 우리 또한 각자의 삶 속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징후를 타인의 얼굴에서 찾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가 보내는 신호를 어디선가 듣고 있으며, 지금 당장은 응답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믿음.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새벽에는 별이 말해주는 것도 어쩌면 그것인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고. 잠시 멀어졌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허무맹랑해 보여도, 비현실적으로 들려도, 누군가가 희망을 버리지 않거나 할 수 있다고 말해주거나, 안 되더라도 한 번 해보자고 말해주면 사람은 당장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삶 앞에서도 조금 더 버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 말은 성공의 약속이 아니라 포기의 연기다. 오늘만은 무너지지 말자, 일단 오늘만은 버텨보자, 그런 뜻에 더 가깝다. 부딪히고 깨지고 쓸리고 깎여나가서 온통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뒤돌아보면 그 작은 상처들이 모두 나를 세공하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있다. 시커멓기만 하던 얼굴도 오래 닳고 오래 견디면 어느 순간 빛을 품는다. 다이아몬드는 상처가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압력을 견뎌낸 끝에야 겨우 그렇게 불릴 수 있는 물질이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너무 늦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하는 것, 사과해야 할 때 사과하지 못하는 것, 붙잡아야 할 때 붙잡지 못하는 것, 이해해야 할 때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시간은 잔인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가진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지금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내게 아무런 신호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단순해서일지도 모른다. 지금 사랑하라는 것. 지금 말하라는 것. 지금 붙잡으라는 것. 다가오는 어둠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인터스텔라》가 끝내 묻는 것도, 《Song One》이 조용히 보여주는 것도, 수많은 이별의 이야기들이 오래 남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 그렇게 멀리 가서 인간이 정말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행성인가, 구원의 기술인가, 아니면 아무리 멀어져도 누군가에게 가닿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인가. 내 대답은 후자에 가깝다. 인간이 정말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언제나 늦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희박한 가능성, 그리고 이해와 용서와 안녕이 아주 짧은 유예 속에서도 끝내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다만 그 답은 우주의 끝에서만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답은 지금 이곳에서, 아직 늦지 않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한마디 속에서 먼저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얼굴을 만드는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