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과 상징의 폭력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개인으로 잔류할 수 있는가?
농담은 때때로 공동체가 자기 폭력을 가장 가볍게 실행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대개 노골적인 적대보다 우스갯소리를 먼저 건넨다. 누군가를 희화화하고, 별명을 붙이고, 약점을 캐릭터처럼 소비하는 동안 폭력은 장난처럼 보이고 배제는 분위기처럼 보인다. 그래서 농담은 양면적이다. 어떤 이에게는 숨 쉴 공간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자신이 더 이상 온전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함께 웃어도 되는 대상으로 분류되었다는 신호가 된다. 공동체는 정색한 혐오보다 가벼운 농담을 통해 먼저 사람을 밀어내고, 바로 그 가벼움 덕분에 자기 잔혹함을 쉽게 부인한다.
아마 그래서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김정훈(배우 문상훈)이 나중에 입대해 넷플릭스 《D.P.》의 김루리(배우 문상훈) 일병이 되었다는 식의 농담 말이다. 얼핏 보면 그저 세계관을 잇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그 말의 바닥에는 아주 익숙하고도 추한 가정이 숨어 있다. 특정한 특성을 가진 사람은 결국 어느 조직에 가서든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가정, 다시 말해 사건의 원인을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이상성에서 먼저 찾으려는 태도다. 그 농담은 가볍지만, 바로 그 가벼움이야말로 문제다. 공동체는 늘 그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먼저 설명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 이어서 문제적 존재로 분류하고, 마침내 배제 가능한 존재로 정리하는 것. 누군가를 우스운 사람, 이상한 사람, 불편한 사람으로 부르는 일은 대개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추방의 예비 단계다.
《D.P.》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그 지점을 겨눈다. 다소 어리숙하고 순박했던 김루리 일병은 어떻게 총기를 난사하는 괴물이 되었는가. 이 질문은 흔히 이해되듯 한 개인의 잠재된 폭력성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군대라는 조직이 어떻게 한 사람을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외따로 떼어놓는지, 조롱과 멸시와 방치가 어떻게 한 사람의 내부를 잠식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그 과정을 보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분위기로, 하나의 관행으로, 하나의 군 생활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조직은 노골적인 폭력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더 자주 그것은 농담, 눈치, 암묵적인 규칙, 침묵의 동조 같은 형태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런 조직일수록 늘 한 사람쯤은 필요하다. 모두가 슬쩍 무시해도 되는 사람, 함께 웃어도 되는 사람, 조금 더 굴려도 되는 사람 말이다.
왕따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왕따는 유대다. 이 말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적 진술에 가깝다. 집단은 내부의 긴장과 불안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기도 하지만, 더 손쉬운 경우에는 내부의 한 사람에게 그것을 집중시킨다. 위계와 불만, 질투와 불안을 각자 감당하는 대신, 모두가 한 사람을 문제라고 합의하는 순간 공동체는 이상할 만큼 평온을 되찾는다. 그 사람은 분위기를 흐리는 자가 되고, 나머지는 정상적인 구성원이 된다. 누군가가 바깥으로 밀려나는 순간, 남은 사람들은 서로가 안쪽에 속해 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많은 집단에서 희생양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생산된다. 특정 개인이 사라져도 그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자리가 공동체 유지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희생양의 얼굴이 언제나 부정의 방식으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때로는 긍정과 추앙의 형식을 빌려, 혁명이나 구원의 얼굴로 소비되기도 한다. 넷플릭스 《Joker》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편에서 조커(호아킨 피닉스)를 중심으로 봉기한 사람들의 분노를 완전히 가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살아가며 무시당하고 밀려나고 우스운 존재로 취급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폭발에 일면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공감이 처음부터 하나의 신념이나 하나의 언어로 묶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굴욕과 각기 다른 패배감이 우연히 한 방향으로 솟구친, 지극히 파편적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 파편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의 얼굴이 필요했다. 조커는 그렇게 탄생한 상징이다.
비극은 아서 플렉이 그 열광의 성격을 오해했다는 데 있다. 그는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본다고 믿는다. 자신에게 반응하고, 자신을 원하고, 마침내 자신이라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한 것은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분노와 환멸을 걸어둘 수 있는 빈 얼굴, 다시 말해 조커라는 표정을 원했다. 사회가 그를 병리로 분류했다면, 군중은 그를 혁명의 얼굴로 소비한다. 사랑이라 믿었던 리 퀸젤조차 그가 아니라 조커라는 가면에 매혹된다. 왕따가 한 사람을 집단 바깥으로 밀어내며 소비하는 방식이라면, 상징 숭배는 한 사람을 집단 한가운데로 끌어올리며 소비하는 방식이다. 하나는 조롱이고 다른 하나는 열광이지만, 둘 다 개인을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폭력이다. 공동체는 우주만큼이나 복잡한 개인을 견디지 못한다. 광장에 모인 그 수많은 ‘아서 플렉’들이 정작 아서 플렉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개인은 늘 공동체의 폭력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희생’되기만 하는가, 혹은 저항하는가? 영화 《국제시장》이 흥미로운 동시에 결정적으로 문제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의 고통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것은 너무도 실재한 고통이었다. 이역만리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혹은 다른 이름의 노동자로 몸을 갈아 넣어야만 가족 하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영화가 그 고통의 원인을 묻는 방식이 아니라,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있다. 구조가 남긴 상처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것을 견뎌낸 개인의 성실함과 가족애다. 국가는 개인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 정작 영화는 그 선택을 시대를 견딘 한 가장의 운명으로 감상화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가장 많이 희생한 이들이 오히려 그 서사에 정서적으로 강하게 결속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단순히 무지나 보수성으로 치부하면 분석이 얕아진다. 오히려 그 심리는 더 복잡하고 더 비극적이다. 한 사람이 자기 삶 대부분을 견디는 데 써버렸다면, 그 고통이 헛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거의 자기부정에 가깝다. 자신이 착취당했고, 버려졌고, 구조적으로 내몰렸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가 평생 붙들고 버텨온 삶의 의미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국가를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자기 삶을 방어한다. 자신이 감내한 궁핍이 단지 무능한 체제를 떠받치기 위한 비용이었을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보다, 그것이 나라를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였다고 믿는 편이 훨씬 덜 잔인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 서사는 개인의 존엄과 묘하게 결합한다. 국가는 개인의 희생을 이용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개인은 자신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정당화에 감정적으로 매달린다. 그래서 체제는 단지 강압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의 의미를 해석하는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런 ‘개인’은 어떨까? 영화 《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 슈미트(케이트 윈슬렛)는 집단에게 그리고 국제시장의 그 할아버지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불편함을 남긴다. 시대가 그랬고 국가가 그랬으며 제도가 그랬다는 말은 분명 사실일 수 있다. 구조는 개인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거대한 폭력의 부속품으로 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나가 끝내 보여주는 태도는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몫까지 완전히 지워버리는 쪽은 아니다. 그녀의 침묵이 곧 숭고함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침묵은, 아무리 시대와 국가를 말하더라도 자신 역시 그 폭력의 미시적 수행자였다는 사실만큼은 남겨두는 태도에 더 가깝다. 구조 뒤에 숨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구조가 자신을 통해 작동했다는 사실까지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마 중요한 차이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긍정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지키려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이 수행한 폭력을 시대의 탓으로만 돌리지 못한 채 끝내 입을 다문다. 전자는 가해 구조를 끌어안음으로써 자기 존재를 방어하고, 후자는 구조를 말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완전히 비워두지 못한다. 그래서 구조를 본다는 일은 언제나 두 갈래의 불편함을 동시에 요구한다. 하나는 개인을 너무 빨리 괴물로 만들고 상징으로 소비하는 공동체와 국가를 의심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그 얼굴이 저지른 선택까지 구조 속에 증발시켜버리지 않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택하는 일이 아니라, 구조가 어떤 얼굴을 만들어냈는지 보되 그 얼굴이 저지른 선택 또한 끝내 비워두지 않는 일이다. 최소한 그 길만이 인간이 스스로를 끝내 부정하지 않고 개인으로 남을 수 있게 한다.